플라톤은 펠레폰네소스(431BC-404BC) 전쟁 중에 아테네의 명문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소크라테스(469BC-399BC)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BC 385년에 아카데미아를 창설했다. 주로 소크라테스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대화 형태의 저술을 남겼다. 플라톤의 『국가』 는 BC 385-375년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전으로 피레우스의 케팔로스의 집에서 폴레마르코스, 트라쉬마스코스, 글라우콘, 아데아만토스 등과 대화한 내용을 담았다.
문제제기: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사회는 2010년에 출판된 마이클 샌델의 도서
『정의란 무엇인가』 로 ‘정의’ 를 향한 열풍이 불었다. 이태수 교수는 정의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말한 정의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국가’란 단어로 표현하지만 실제 그의 철학의 포인트는 ‘정의’에 있다고 본다.
“정의는 우리가 따로 그 의미를 교육받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옳고 나쁜 것을 구분하고 나쁜 것을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일례로 학교 내에서 체벌을 받을 때 육체적 고통 외에 부당함에 기분이 상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 이유의 핵심은 공정 혹은 형평(ison=equal)에 있다.”
이태수 교수는 정의에는 교정적 정의, 시정적 정의, 배분적 정의가 있다고 하면서, 그 중에서 공정의 기준은 배분적 정의의 경우 문제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공평이란 개념을 교육받지 못한 동일조건의 세 사람이 파이를 나눠먹는 상황에 빗대었다. 세 사람이 빠르게 공평하게 파이를 나눠먹는 방법 중 이상적인 것은 공평의 개념을 가르친 후 나눠먹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많은 시일을 소요하므로 이 교수는 고르는 순서를 정한 후, 마지막에 고르는 사람이 파이를 자르는 방법을 선택하면 공정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답했다.
“사람들이 공평이라는 개념을 모른다고 해도 그 절차가 올바르다면 파이케이스처럼 정의가 실현된 윤리적 사회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서양의 자유 철학적 사고(liberalism)다. 한때 서양에서는 개개인이 무엇을 하든 그들의 윤리에 관계없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주체가 국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셋 중 누구라도 공정의 개념을 살아야 그 절차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구성원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자유주의 철학적 사고에 기초한 배분적 정의는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윤리를 별개로 보았다. 하지만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의 윤리와 연관시킨 개념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의 의견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그 사회의 구성원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플라톤의 『국가』 를 통해본 ‘정의’의 의미
플라톤의 『국가』 에서는 ‘정의’를 4번에 걸친 토론에서 설명한다. 첫 번째 정의시도는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부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남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경우, 남에게 합당하는 것을 돌려주는 사례에 대한 질문에 플레마르코스는 “친구들에게 뭔가 좋은 일을 해주되, 적들에게는 무엇인가 나쁜 일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플레마르코스의 대답은 기존에 세습적으로 이루어진 순응주의적 소극적 정의관에 따른 정의에 관한 답이다.
여기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대화로 정의의 의미를 도출하려 시도한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란 법에 따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법은 강자의 이득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강자의 이득이 정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의 탐욕에 의해 실수할 가능성을 들며 이를 반박한다.
세 번째 정의 시도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와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좋은 것이라면 어떤 의미인가, 하고 묻는다. 좋음이란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좋음을 결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정의는 서로에게 불의를 행할 때 겪게 되는 피해를 피하기 위해 불의를 행하지 않기로 상호협약한 내용으로 그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네 번째 시도는 소크라테스의 이상국가 모델에서 이루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작은 글씨로 쓴 글과 큰 글씨로 쓴 글을 비유로 들어 국가와 개인의 유사성(anlogy)을 주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바라보는 이상국가의 골격은 통치자, 조력자, 생산자 세 계급으로 구성되며 빈부 격차의 최소화를 지향한다. 수호자 집단은 통치자와 조력자로 구성된다. 그들에게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으며 의무적으로 일정내용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통치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선발된다.
이상국가에서는 국가나 개인의 훌륭함이 네 가지 덕(arete)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를 통해 드러나고 이는 각 계급, 개인에게 있어 영혼의 각 부분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지혜’는 국가에서는 통치자 계급의 덕이고 개인의 영혼에서는 이성의 덕이다. ‘용기’는 국가에서는 조력자 계급의 덕이고 개인의 영혼에서는 기개의 덕이다. ‘절제’는 국가에서는 각 계급이 지례호운 통지에 따르는 덕이고 개인의 영혼에서는 욕망이나 기개가 이성의 통제에 따르는 것이다. 그중에서 ‘정의’는 이상 각 계급이나 영혼의 부분이 제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함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루는 전체의 덕이다.
이태수 교수가 주목한 정의는 세 번째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정의 시도는 자연적, 경험적 관점에 따른 것으로 두 번째 정의시도의 소크라테스의 반박처럼 현대에도 통치자라는 이름의 사람은 많이 존재하나 진정한 통치자는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 교수는 정의란 병원에서 맞는 주사와 같은 존재이고, 국가론의 핵심은 계약이라고 주장한다.
강연의 마무리
이태수 교수는 강연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책임, 근면, 성실이 교훈인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이는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개념으로 식민지국가가 종속되기 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또한 국가가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측면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이 교수는 정의로운 사회는 이렇게 종속된 개개인에게 제대로 재화를 분배한다는 개념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정의로운 사회는 개인에게 할 몫을 주고 그 기능을 하게 해줄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올바른 국가의 기능이다.”
이 날의 첫 강연은 플라톤의 『국가』 를 전체적으로 조감해보는 시간이었다. 이어질 강연은 10월26일에 이루어질 예정이다. 두 번째 강연에서는 플라톤의 국가 중 1권 350e 354c, 5권 474b~470a, 7권 514a~521b , 7권 539d~541b을 내용으로 중점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스테파노판 기준) 이태수 교수는 특히 7권 539d~541b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동굴에 비유한 부분은 꼭 읽어올 것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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