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순의 예능유희를 시작하며
예능은 현 사회를 알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분석 도구
웃긴 상황이나 말을 통해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것은 결국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소수인 방송인들이 불특정다수인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개성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대중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반대로 시청자들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코드를 찾아내면 우리 사회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이 사회 분석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을 좋아했다. 텔레비전 속 프로그램들은 내 세상의 전부였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알짜배기만을 모아놓은 프로그램은 노력의 결정체다. 우리가 직접 그것을 현장에 가서 느끼고자 한다면 아마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가 걸릴 것이다.
그렇게 자라 학부에서 방송학을 전공했다. 영화와 방송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방송 프로그램이 감동이나 재미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읽을 수 있는 훌륭한 분석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능 프로그램은 웃기려고 만든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히 여기에 감동까지 더해져야만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웃긴다는 것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80년대 최고였던 프로그램을 지금의 세대들이 봤을 때 웃지 않는 것은 단순히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웃긴 상황이나 말을 통해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것은 결국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소수인 방송인들이 불특정다수인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개성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대중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반대로 시청자들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코드를 찾아내면 우리 사회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이 사회 분석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학부 때까지 배운 것이다. 이런 딱딱한 이론은 차치하고 시청자와 방송 제작자간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다. 물론 방송은 만들어서 전파를 통해 시청자에게 보여 지는 순간 그 의미는 시청자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제작자의 의도와는 다르더라도 시청자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것이 맞다. 여기에는 여러 코드들이 잘못 읽힐 우려도 있다. 그러면 어떠랴, 아직 세상이 신기한 것 투성이인 아기가 작은 사물도 장난감처럼 갖고 놀듯이 그렇게 예능 프로그램을 갖고 놀고 싶다. 학교 시험처럼 지문을 통해 작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를 읽고 그것을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내 생각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아준다면 나로서는 성공이다.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딛은 신입기자. 한 후배는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은 젤리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공연과 영화, 전시회를 보고 누리꾼들과 소통하는 지식소매상. 내가 쓴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대신 그래도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는 희망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