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연애와 도박으로 얼룩진 유럽 체류
몽땅 잃고 말았다, 몽땅 다……!!
수슬로바는 빼어난 미모, 차가운 지성,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였다. 그녀는 도스또예프스끼와 연애 행각을 벌이고는 곧 냉정하게 그를 차버렸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녀를 쉽게 잊지 못했다.
수슬로바와의 연애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오기 전부터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폐병에 걸린 그녀는 1863년 봄부터 상태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아내의 건강도 걱정이었지만 잡지「시대」가 폐간된 후 그 뒷일을 처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도스또예프스끼 형제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와중에 도스또예프스끼는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도피하듯 젊은 신세대 여성과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도스또예프스끼보다 열여덟 살 연하였던 A. 수슬로바(1839~1918)가 그 주인공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수슬로바를 처음 본 것은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던 1861년 초로 추정된다. 그는 미모에 자유분방하고 고고한 성격을 지닌 뻬쩨르부르그 대학 학생에게 호감을 가졌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딸 L. 표도로브나(1869~1926)의 회상기에 따르면 수슬로바는 존경하는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이 편지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녀는「시대」의 독자였고, 1861년 잡지 10월호에 단편을 기고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녀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게 된 것은 이 시기 전후일 것이다. 둘의 관계는 이후에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몽환적인 유럽 여행을 꿈꿨다. 1863년 6월 수슬로바가 먼저 파리로 떠났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잡지와 집안일 때문에 8월에야 연인이 머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슬로바는 빼어난 미모, 차가운 지성,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였다. 그녀는 도스또예프스끼와 연애 행각을 벌이고는 곧 냉정하게 그를 차버렸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녀를 쉽게 잊지 못했다. 그는 1865년 4월 19일 수슬로바의 여동생이자 러시아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된 N. 쁘로꼬피예브나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아뽈리나리야는 대단한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녀의 이기심과 자존심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그녀는 남들에게 모든 것, 완전무결함을 요구했고, 다른 사람들의 장점에 대해서 한 치의 부족함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녀 자신은 남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 나는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
수슬로바와의 연애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창작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팜 파탈 여주인공의 모델이 바로 수슬로바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노름꾼』의 뽈리나, 『백치』의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그루셴까를 그리면서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이 여주인공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작가는 현실에서 그녀를 어쩔 수 없었지만 소설의 세계에서는 달랐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작품에서 팜 파탈 여주인공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도박에 빠지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두번째 유럽 여행은 연애와 도박으로 얼룩졌다. 그는 유럽 도처를 돌아다니며 도박에 열중했고, 결과적으로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빚을 겨우 갚고 나서 또 도박을 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돈이 떨어져 호텔에서 여러 번 쫓겨날 뻔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금전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고 돈을 구걸했다. 특히 뚜르게네프와는 돈 문제로 평생 잊지 못할 감정의 앙금이 생겼다.
독일 비스바덴의 빅토리아 호텔, 밥값도 없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종일 호텔방에 갇혀 지냈다. 움직이면 식욕이 생길까봐 앉아서 내내 책만 읽었다. 그의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매일 점심을 먹지 못했고, 아침과 저녁은 차로 때운 지 여러 날 되었다. 호텔 직원들은 러시아 작가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전날 쓰던 양초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밤에 양초도 주지 않았다. 그는 고골의 『검찰관』에 나오는 희대의 사기꾼 흘레스따꼬프와 처지가 비슷했다. 여관비를 내지 못하자 주인은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고, 우리의 흘레스따꼬프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투덜거렸다.
이런 경험들이 『노름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빚을 갚으려고 쓴 소설들 중 하나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작품에서 유럽 여행에서 맛보았던 사랑과 도박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도박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 소설에서 탁월하게 묘사했다. 특히 다음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 중 하나로 노름꾼의 병적인 충동을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 『노름꾼』의 마지막 장면이다.
난 그때, 몽땅 잃고 말았다, 몽땅 다…… 역에서 나와 뒤져보니 내 조끼주머니 속에는 달랑 1굴덴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결국 이 돈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백 걸음쯤 지나왔을 때 생각을 고쳐먹고 되돌아갔다. 그 1굴덴을 망크에 걸었다(그때는 망크가 잘 나오고 있었다). 홀로 외국에서 친척과 친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오늘 때울 끼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면서 마지막 남은, 정말 마지막 남은 굴덴을 걸 때에는 뭔가 독특한 감흥이 느껴졌다. |
계속되는 시련
도스또예프스끼는 1863년 10월 말 유럽에서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연애와 도박에 빠져 있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 죽어가는 아내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였다. 1864년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비극적인 한 해였다. 아내가 죽고 석 달 뒤인 7월에는 형 미하일이 세상을 떠났다. 형의 죽음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것은 아내의 죽음보다도 그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미하일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친형이자 문학적 동지였고, 일생 동안 변치 않은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다. 이런 와중에 같은 해 9월 잡지「시대」의 동인 중 한 사람인 비평가 아뽈론 그리고리예프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미하일이 죽자 잡지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세기」는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1865년 6월 문을 닫고 말았다.「세기」의 실패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완전히 파산했다. 그는 죽은 형의 빚을 그대로 떠안았고, 형수와 조카들을 부양하기로 서약했다. 채권자들은 도스또예프스끼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윽박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작품 모두를 걸고 출판업자와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돈이 떨어지면서 그의 불안 증세는 날로 심해졌다. 이때 악덕업자 F. 스쩰로프스끼(1826~1875)가 도스또예프스끼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을 착취한 희대의 사기꾼이자 투기꾼이었다.
저자가 모스끄바 국립대학 재학 시절 도스또예프스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부터 모아온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2009년과 2010년 여름,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모스끄바,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전개한 뻬쩨르부르그,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중 4년간 감옥살이를 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전원생활을 즐긴 스따라야 루사 등 직접 취재한 기록을 담았다...
관련태그: 도스또예프스끼, 수슬로바, 노름꾼, 백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같은 대학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하일 부가꼬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모르핀』, 벨린스끼 문학비평선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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