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책 > 김선오의 시와 농담
[김선오 칼럼] 지나갈 수 있는 곳이 빈 곳이겠지
김선오의 시와 농담 5편
쓰는 사람의 일이란 부재의 공간에 먼저 도착해 어렵게 오는 말을 맞이하는 ‘문서 없는 제목’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빈 곳에서 발생할 지나감의 가능성을 믿는 것일까. (2024.05.02)
텍스트의 독자로서 잊기 쉬운 사실 중 하나는 글을 읽기 전에 우리가 글을 본다는 것이다. 보는 행위와 읽는 행위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만 ‘보기’ 없이 ‘읽기’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기가 읽기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읽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글자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볼 수 없이 읽을 수는 없다. 본다는 것은 위치를 가진 ‘보기’의 대상이 거기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종이 위에 놓여 있는 글자는 바둑판 위의 바둑알처럼 선명한 좌표를 갖는다. 좌표에 따라 의미는 다르게 생성된다. 그러나 ‘읽기’ 이전의 ‘보기’ 상태에서 의미는 글자라는 형상 속에 잠재된 채 생성을 멈춘다. 그러므로 의미란 ‘읽기’가 발생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무의미란 ‘보기’가 발생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글을 대하는 우리의 눈을 ‘읽기’ 이전의 ‘보기’ 상태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대상을 보려면 대상의 위치가 있어야 하고 위치는 공간과 결부된다. 글자의 공간은? 문서다. ‘보기’의 공간을 다르게 구성한다면 ‘읽기’에는 어떠한 변화가 발생할까? 나에게 『문서 없는 제목』의 시들은 공간과 배치를 통해 이러한 ‘읽기’와 ‘보기’ 사이의 미묘한 선행-후행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탐험과 실험의 과정처럼 읽히기도 했다.
빈 곳으로 가려고
시간을 더 써서
시간을 덜 쓴
거기
거기가 빈 곳이라면
지나갈 수 있는 곳이 빈 곳이겠지, 동그라미표가 말했다.
- 김뉘연, 「실행 취소」 전문
『문서 없는 제목』이라는 시집의 이름은 ‘문서’라는 공간의 부재를 지시한다. 흔히 ‘제목’이란 문서를 부연하거나 대표하는 기능을 맡는다. 그러므로 ‘없는 문서’의 ‘제목’이란 ‘부재 자체를 부연하거나 대표하는 언어’인 셈이다. 그런데 부재란 반대의 위상을 지닌 에너지의 충돌이다. 오큘로 4호에서 류한길과 이한범이 나눈 대화 「픽션의 한계」의 일부를 인용해 보자면 어떤 사인파(sine wave)가 있다고 할 때, 이 사인파의 주파수가 커지면 '삐-'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동일한 주파수의 위상이 다른 사인파 또한 똑같은 삐-소리를 낸다. 이 두 개를 합성하면, 즉 두 개의 다른 위상이 만나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침묵의 상태가 된다. 두 개의 에너지가 작동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음향적으로 침묵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최소 두 개 이상의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는 상태이다. ‘문서 없는 제목’에서 지시되는 부재의 공간 역시 그 자체로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위상을 지닌 언어의 충돌을 통해 발생 가능한 빈터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위 시에서 동그라미표는 “지나갈 수 있는 곳이 빈 곳이겠지”라고, 빈 곳이란 어떤 의미와 움직임과 에너지가 가능태로 존재하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문서 없는 제목』에는 ‘동그라미표’라는 해석되지 않는 기호가 종종 등장한다. 진부책방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김뉘연 시인이 언뜻 이야기했던 내용을 토대로 그의 홈페이지를 염탐해 보았다. 아래 내용은 김뉘연과 전용완의 홈페이지에 수록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www.kimnuiyeon.jeonyongwan.kr)
김뉘연·전용완, ○ ○ ○○ ○ ○ ○○○ ○ ○○, ○ ○ ○ ○ ○ ○ ○○○ ○○., 말은 쉽게 오지 않는다, 이음갤러리, 2021년. 말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개최하는 장애 예술 플랫폼 ‘무장애예술주간’의 디자인 전시다.
(...)
우리는 위에서 밝히지 않은 번역문의 프랑스어 원문을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 바꾸어 적고, 이를 다시 국립국어원에서 2018년에 발간한 한글 점자 규정 해설의 기본 원칙에 따라 점자로 변환한 다음, 이 점자를 종이에 돋움내기(엠보싱)로 드러내고 유리를 끼운 액자에 넣었다. 그러므로 본래 손으로 만져 가며 읽어 나가야 하는 점자를 만질 수 없도록 전시하는 것이지만, 점자와 프랑스어를 모두 익힌 비시각장애인이라도 프랑스어 문장을 외래어 표기법에 준해 한글로 바꾸어 적은 문장을 눈으로 읽고서 원래의 뜻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즉 시각장애인은 만질 수 없어서 읽을 수 없고, 비시각장애인은 볼 수 있지만 해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가능한 한 읽을 수 없도록 설정된 조건 속에서 과연 말은 쉽게 오지 않는다.
동그라미표는 시집 외부에 존재하는 위 작업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은 쉽게 오지 않는다>에서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은 ‘말할 수 없음’ 혹은 ‘말하기의 어려움’ 속에서 동질성을 갖는다. 이러한 난점은 동그라미표를 통해 기호화된다. 『문서 없는 제목』 속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말들의 나열에서 불가해한 온기를 느꼈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말은 정말이지 쉽게 오지 않는다. 쓰는 사람의 일이란 부재의 공간에 먼저 도착해 어렵게 오는 말을 맞이하는 ‘문서 없는 제목’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빈 곳에서 발생할 지나감의 가능성을 믿는 것일까. 『문서 없는 제목』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추천기사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김뉘연> 저11,700원(10% + 5%)
『문서 없는 제목』에서 시인은 시를 언어 차원을 넘어 문자로 ‘맥박’처럼 감각하게 합니다. 다시 쓰고 풀어 쓰고 설명하고 지시하고 여럿-다중성과 행위성을 감각하게 하며 접힘과 펼쳐짐이라는 시학을 넌지시 제시함으로써 시인은 텍스트를 제자리인 듯 그럼에도 끊임없이 도각도각 옮겨놓습니다. 그 섬세하지만 볼록한 기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