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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칼럼]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안팎으로 아름답고 울창하다
김선오의 시와 농담 4편
확정할 수 없는 대상을 걱정하는, 따뜻하고 어딘지 씁쓸한 온기는 시집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쩌면 이야기란 대상을 확정하지 않는 것이구나, 확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2024.04.18)
몇 년 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로션을 바르다 창밖을 보았는데 흰색 비닐봉지 하나가 아파트 십 층 높이의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추락할 듯 말 듯 비틀거리는 몸짓을 잠시 지켜보다 로션을 마저 바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창밖을 보았을 때 그 자리에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건 뭐였을까? 비닐봉지였을까, 새였을까?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었을까? 비닐봉지든 새든 둘 중 확실한 무엇이었다면 잊히고 말았을 그 순간은 나에게 비닐봉지거나 새이거나 그중 무엇도 아닌 것을 보았던 기억으로, 나의 시선과 생각을 확신할 수 없는 순간으로, 다만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창밖을 보았습니다 흔하디흔한, 차라리 어두운 쪽에 가까워서 누군가를 깜짝 놀래키는 용도에 걸맞을 가로등 아래 작고 하얀 물체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토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토끼였고 점점 토끼였고 귀가 길고 눈은 빨갛고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인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도심의 가로등 아래 토끼라니 나는 그만 흥분하여 여러분 토끼입니다 저기 토끼가 있어요 외쳤어요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토끼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토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 채 점차 나는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긴 귀를 감추려 들거나 빨간 눈을 깜빡이거나 깡충깡충 뛰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 토끼는 하얀 조약돌이나 버려진 빵 봉투가 아닐까 귀가 길고 눈이 빨간 하얀 조약돌 깡충깡충 뛰어 사라지는 빵 봉투 하얀 조약돌의 눈과 빵 봉투의 귀를 가진 토끼의 형식은 가로등 아래 꼼짝도 하지 않고 대신 저것은 토끼가 아니지 않은가 토끼일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불신으로 가득 차서는 마침내 저것은 토끼가 아닙니다 저것은 토끼가 아니에요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창밖은 짙어가는 어둠 토끼와 토끼가 아닌 것 사이에서 나는 고통스러워 더 이상 창밖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했는데 다시 혹한의 겨울밤이 되면 마른 바람이 찾아와 창문이 덜컹이고 뼛속까지 시려 잠이 들지 못하는 그런 밤이 찾아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토끼를 걱정하게 됩니다 너무 추운 것은 아닐까 토끼는 무사한 것일까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 유희경, 「이야기—겨울밤 토끼 걱정」 전문
“만화경 속 이미지와 같이 이야기는 반복해서 나타나”(유희경, 「이야기—해제」 中)는 것일까. 「이야기—겨울밤 토끼 걱정」을 처음 읽었을 때, 토끼라고 믿었다가 재차 토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시간이 흘러 혹한의 겨울밤이 찾아오면 마침내 그 토끼를 걱정하고 마는 화자의 다감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마치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형식으로서 그 순간을 겪었던 것처럼 몇 년 전의 비닐봉지(어쩌면 새)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그것의 위태로운 비행을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끝내 토끼를 잊지 못하는 화자처럼 그 비닐봉지-새를 몇 년째 회상하고 있었다. 겨울밤에 혼자 토끼를 목격한 화자와 마찬가지로 집에는 나뿐이었기에, 누구에게도 그것이 무엇처럼 보이는지 물어보거나 확인할 수 없었다. 확정할 수 없는 대상을 걱정하는, 따뜻하고 어딘지 씁쓸한 온기는 시집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쩌면 이야기란 대상을 확정하지 않는 것이구나, 확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 하나는 「이야기—이야기」이다. 이 시의 등장인물인 k는 책을 읽다 갑자기 등장한 빈 페이지에 귀를 기울여 책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 속 봄날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아 슬프고 / 돌이킬 수 없어 아름답지. / 기억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 k는 말한다.
나에게는 이런 기억이 있다. 작년여름 사가독서의 나무 테이블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유희경 시인은 다음 시집 제목으로 ‘겨울밤 토끼 걱정’을 떠올리고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때 내가 손으로 박수를 쳤는지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는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그날의 햇살은 아름다웠고 녹음은 무성했다. 한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자주 웃었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안팎으로 아름답고 울창하다.” (유희경, 「이야기—해제」 中) 이 역시 내가 두고두고 기억할 하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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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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