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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칼럼]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어

김선오의 시와 농담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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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진하는 밤』을 펼치자마자 나타난 이 시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이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2024.03.21)


요즘 이런저런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시 창작 수업에 강사로 참여하며 지내고 있다. 시 쓰기를 가르친다기보다 관습적인 시 창작 수업들로부터 좀 거리를 두고 일종의 시 쓰는 공동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중이다. 시에 대한 판단을 지연시키고 쓰기의 다양한 기준을 옹호하며 어떠한 억압으로부터 스스로를 잠시 구출해 보자는 마음으로…… 의도야 어찌 되었든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는 시에 대해 아는 얘기 모르는 얘기를 주절대다 오게 되는 셈인데 시 이야기 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할 수 있는 친구도 많이 없기에 얼마간 재미를 느끼면서도, 시라는 것은 말로 해버리면 도망을 가버리는지라 정작 시 이야기만 남고 시 자체는 사라져 버리는 부작용이 있기도 하다.

글도 제목 따라가는 것인지 ‘시와 농담’이라는 코너명을 정해두고 나니 확실히 글에 힘이 빠지고 무언가 중얼거리게 된다. 중얼거림이 농담은 아니지만 내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농담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얼거린 김에 더 이야기해 보자면 선생 노릇을 하기 전, 그러니까 시인으로 등단하여 활동하기 전에 나는 온갖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시 창작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주말이나 퇴근 후에 판교에서 한 시간 반 광역버스 타고 마포구로 넘어가 시 창작 수업을 듣는 것이 여가 시간의 대부분이었는데, 문예창작과 출신도 아니고 시 쓰는 친구도 거의 없던 나에게 시인 선생님, 시 쓰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소중했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강사가 아니라 수강생으로서 이 수업 저 수업 끼어들고 싶을 만큼…… 천둥벌거숭이처럼 시 쓰던 그 시절의 나에게 다정한 말씀 건네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얼마 전에는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 중 한 분의 시에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다. 시의 제목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다.


선생님 댁 벽난로 앞에서 나는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과를 깎았고 누군가

허리를 구부려 콘솔 위의 도자기를 자세히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창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비를 올려다보았고 누군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뭘 보는 거야?

비 오는 걸 보는 거야?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다 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처마 밑에 벌집이 있는데요?

119를 불러서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선생님을 처마 아래로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말벌만 쳐다보았다

겨울이 되고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는댔어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온다구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옆에 앉으며

말벌의 독침은 연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옆에 다가와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벌에 쏘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벌집을 들고 내려왔다 이건 작년 겨울에

처마 밑에 있던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저 벌집도 내 차지야

벌집은 정말로 육각형이었다

까끌까끌했지만 보석 같았다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선생님은 2층에 벌집이 하나 더 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 김소연, 「흩어져 있던 사람들」 전문, 『촉진하는 밤』 수록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김소연 시인의 시집 『촉진하는 밤』에 수록된 첫 번째 시다. ‘선생님 댁’이라는 공간은 기이한 데가 있다. 벽난로가 있다니 어쩐지 교외일 것 같고, 그곳의 방문자들은 같은 선생님을 공유하는 친구들인 것 같은데 왜인지 사과를 깎거나 도자기를 들여다보거나 비를 구경하며 서로 흩어져 있다. 느닷없이 실내에 들어온 말벌 한 마리로 인해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모여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겨울이 되고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게 되리라는 누군가의 말은 선생님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든 구성원들이 영원히 선생님 댁을 떠나게 될 어느 순간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촉진하는 밤』을 펼치자마자 나타난 이 시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이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사과, 도자기, 벌집의 둥근 형태가 시 안에서 만들어내는 고요한 순환, 시에서 풍겨 오는 겨울 숲의 비 냄새, 말인 듯 문장인 듯 이어지는 대화의 질감,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온다구’ 말하는 귀엽고 다부진 목소리, 까끌까끌하지만 보석 같은 빈 벌집, 하나 더 있는 벌집을 찾으러 2층으로 올라간 선생님의 발소리와 뒷모습…… 이유는 너무 많다.

나의 시에 관해 선생님이 해주셨던 다양한 조언들 중 지금도 강렬하게 기억나는 내용 중 하나는 ‘희구하지 말고 현현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내 시의 화자는 대체로 무언가를 바라고 구하며 애타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 수업 시간에 에이포 용지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어째서 희구라는 것이 내 시에 필요한지 적어 갔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보 같기는…… 선생님은 관대하게도 이 정도 고민했으면 됐다고 말씀하셨다. 시의 문장들을 현현하게 하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결속을 희구하지 않는다. 다만 말벌이 나타났기에, 벌집을 발견했기에 그들은 잠시 ‘모여든 사람들’로서 현현한다. ‘모여든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다시 ‘흩어진 사람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함께 벌집을 내려다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말벌의 행방을 궁금해했던 그 시간은 그들의 감각과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 가볍고 느슨하고 따뜻한 연대, 그 연대의 배음으로서 교차되며 들려오는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촉진하는 밤
촉진하는 밤
김소연 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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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선오(시인)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촉진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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