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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조건 : GOT the beat ‘Step Back’
SM엔터테인먼트의 어벤져스, GOT the beat
누구도 알 수 없는 얼굴로 끝까지 살아남는 것도, 전설의 조건이라면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2022.01.05)
케이팝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해도 부끄럽지 않은 몇 안 되는 가수 보아가 중심에 서 있다. 그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늘어선 6인의 면면도 심상치가 않다. 우선 보아 양옆에 선 좌청룡 우백호는 올해로 데뷔 15년 차를 맞이한 소녀시대의 메인 보컬 태연과 메인 댄서 효연이다. 그런 그들 옆에 마치 동일 포지션의 명성이라도 이어가듯 레드벨벳의 웬디와 슬기가 열을 맞춰 서 있다. 명실상부한 ‘요즘 대세’ 에스파의 카리나와 윈터가 라인업의 문을 닫는다. SM엔터테인먼트의 또 다른 어벤져스 그룹, GOT the beat.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를 좋아한 적이 있건 없건, 해당 레이블의 음악이 취향이건 아니건 눈길을 끌 수밖에 조합의 등장이었다.
이건 요즘 말로 ‘되는 주식’이었다. 이들의 결성 소식과 티저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케이팝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하나씩 말을 보탰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현존하는 케이팝 역사상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기획사에서, 케이팝의 머릿돌을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에서 요즘 대세까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묶은 조합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GOT the beat 멤버 대부분이 소속 그룹에서 메인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 데다, 2019년 남성 멤버들을 대상으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SuperM 이후 꾸준히 있어온 동일한 콘셉트의 여성 어벤저스 조에 대한 케이팝 팬들의 니즈까지 힘을 보탰다.
소문만 무성했던 이들의 실체는 SM이 2022년의 시작과 함께 연 무료 온라인 콘서트 '에스엠타운 라이브 2022 : SMCU 익스프레스@광야’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결과물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였다. 노래는 NCT나 에스파 등 신진 그룹들의 최근 앨범에서 프로듀서 유영진을 중심으로 한 곡들을 꼼꼼히 들어온 이들이라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질, 힙합을 베이스로 유영진 풍 R&B를 SM 식으로 얹어낸 특유의 SMP-팝-트랙이었다. 사전 녹화로 촬영한 무대 완성도도 높은 편이었다. 정식 그룹이 아닌 일회성 유닛이라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GOT the beat 멤버 하나하나가 가진 화려함의 빛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같은 후렴구를 부르는 보아, 슬기, 윈터, 태연의 목소리가 가진 각자의 매력, ‘Girls, Bring it on!’이라는 구호와 함께 이어지는 보아, 효연, 슬기의 댄스 브레이크 등은 그동안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을 눈앞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희열 그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그 바탕에 연차와 상관없이 자기 몫을 너끈히 해내는 멤버들의 역량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예상을 벗어난 건 의외의 포인트였다. 다름 아닌 노랫말이었다. 온라인 콘서트가 첫 공개였던 탓에, 그리고 모든 곡의 가사가 영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동시 송출된 탓에 더욱 반응이 뜨거웠다. 붉은 조명 아래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무대 위에 선 GOT the beat 멤버들이 목 놓아 부른 건 뜬금없는 신파 스토리였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짝사랑이나 소꿉장난, 추억 팔이 같은 단어를 눈앞에 던지던 이들은 갑작스레 ‘내 남잔 지금 너 따윈 꿈도 못 꿀 Another level’이라며 주위에 몰려든 손들을 걷어치웠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라거나 ‘내가 뜨면 시선 집중’ 같은, 도무지 눈과 귀를 어디에 둬야 할 지 알 수 없는 무안함의 폭풍 속에 문득 생각 하나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이건 어쩌면 호불호와 상관없이 SMP를 받아들이고 즐겨온 이들에게 충분히 예견된 사건 같은 상황이었다.
주지하다시피, SMP의 특징은 한없이 비장하고 웅장한 분위기이며 그에 뚜렷한 방점을 찍는 것은 언제나 노랫말이었다. 특히 뚜렷한 서사나 내용 없이 모호한 분노와 이미지를 강조하는 SMP의 노랫말은 그 무궁한 한없음이 결국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많았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결국 백기를 들며 그 목적 없는 분노 에너지 자체를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렇게 웃다 정들어 버린 상황의 반복이 낳은 곡이 ‘Step Back’이라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싶다. 웃다 보니 웃을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아무튼 휘몰아치는 SMP 노랫말의 모호함 속에서,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고 싶다’(보아 ‘Girls On Top’)는 가사를 쓰던 사람이 17년 뒤 ‘착한 남자들에게 너는 독배 같다’는 가사를 쓰는 세계관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프닝은 또다시 해프닝 자체로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광야’와도 같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얼굴로 끝까지 살아남는 것도, 전설의 조건이라면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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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