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12월 우수상 - 엄마 집에 없어!
일상 속 나만의 사치
나의 이 은밀한 취미생활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서 어렸을 적 엄마가 보던 연속극 시간을 만화영화 시간보다 더 기다렸다. (2020.12.04)
'드라마 같은 소리 하네'
현실에 닿아있지 않은 허황된 얘기나 맥락 없는 낙관론과 마주할 때 사람들은 실소를 머금은 채 작게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반응한다.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소설이나 영화와 마찬가지지만 드라마는 약간 다른 급으로 여겨지기 다반사다.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우니 다소 만만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드라마 전편을 다 시청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 시간의 여유 있음이 무능함과 유의어로 여겨지는 요즘 세태 속에서 '드라마 보기'를 취미라고 선뜻 인정하기란 남들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쉽지 않았다.
나의 이 은밀한 취미생활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서 어렸을 적 엄마가 보던 연속극 시간을 만화영화 시간보다 더 기다렸다. 연속극 방영 시간이 다가오면 서둘러 TV를 켜고 이제 곧 시작한다며 엄마를 불러대곤 했다. 간혹 연속극이 시작되었는데도 아직 집안일이 남은 엄마가 여전히 부엌에 있을 때면 엄마는 이 연속극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하는 마음에 내가 더 조바심을 치기도 했다. 당신을 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옆에 착 붙어 열중하는 모습이 귀여우셨는지 엄마는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붙여가며 기꺼이 함께 연속극을 보셨다. 하지만 달콤했던 그 시간은 계속되지 못했다. 공부량이 늘어나는 시기가 되자 연속극을 보고 있는 엄마 옆에 슬쩍 앉을라치면 곧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시험 기간에는 지나가며 엄마가 보고 있던 드라마를 곁눈으로 슬쩍 보기만 해도 엄마의 작은 한숨과 함께 TV 화면이 '딱' 꺼졌다. 이런 설움과 갈망의 시간을 지나 대학교에 진학하고 또 사회인이 되니 그땐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즐거움이 더 크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경력단절이 오래된 중년의 전업주부가 되어있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혼자 머물고 있었다. '어, 분명 얼마 전까지 커피 한 잔을 따뜻한 채로 끝까지 마실 수도 없었는데......'
세상은 이미 너무 변해버렸고 내 손을 거치지 않고는 숨조차 쉬지 못할 것 같던 아이는 어느새 내 손을 놓고 저만치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황당하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 그동안 참 많이 애썼지. 이제 나를 위해서 시간을 보내야지.'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를 위해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때 한켠으로 제쳐두었던 드라마가 다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동안에도 식구들이 북적대는 사이에서 빨래를 개고, 마늘을 까고, 멸치 똥을 따면서 드라마를 봤었다. 하지만 조용히 혼자서 집중해서 보는 드라마는 그 결이 달랐다. 드라마 속의 대사, 음악, 풍경, 소품들이 감정을 꽁꽁 묶어두기를 강요받는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걸러지고 선택되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쉽게 보이기 위해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함을, 결과물 하나를 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함을 아는 나이가 됐기에 드라마 한 편 한 편이 그저 고마웠다. 각 분야의 고수들이 애를 써서 만든 작품을 소파에 앉아 단지 전원을 켜는 수고만으로 즐긴 뒤에는 미련 없이 지나쳐 또 다른 작품을 즐길 수 있다니,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다. (물론 어떤 작품은 무한 반복으로 시청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를 위해 새삼스레 지출을 감행하기 망설여지는 전업주부인 내가, 또 여기저기 다닌다고 오랜 시간 외출을 할 수도 없는 24시간 대기조인 내가 누리기에 드라마 보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취미이자 세상과 연결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가족들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내 취미는 드라마 보기이며 내 취미가 왜 좋은지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내 논리에 감복(?) 한 가족들은 내 취미를 적극적으로 응원해 준다.
하루의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영업 끝!'을 외친 뒤 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부터 한 시간 동안 엄마는 집에 없어!"
거실 한편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간혹 한 캔의 맥주도 곁들이는 이 시간은 오롯이 나의 즐거움을 위한 시간이다. 일상 속 나만의 작은 호사이다.
박소현 동네 어디서나 마주치는 수많은 아줌마 중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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