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12월 대상 - 나는 무려 춤추는 엄마다
일상 속 나만의 사치
“너는 저런 거 못 하지?” 의도가 무엇이었든 저 한마디는 나를 춤의 세계로 풍덩 밀어 넣었다. (2020.12.04)
“너는 저런 거 못 하지?”
15년 전, 지금의 남편이 남자친구이던 시절 나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지하철역 근처에 마련된 조촐한 무대 위에서는 30~40대 여성들이 댄스 공연을 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프로는 아니었다. 그러니 남자친구의 질문은 ‘너는 춤 못 추지?’ 이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너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 같은 거 못 하지?’ 이 질문이었을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저 한마디는 나를 춤의 세계로 풍덩 밀어 넣었다. 저 발언 때문에 화가 났다거나 자존심이 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그 시작은 오기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저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러게. 나도 저런 것을 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몸치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몸치, 박치, 음치 모두 해당했다. 그래서 딱히 발전에 대한 기대 심리는 없었다. 그저 이 경험을 즐겁고 엉뚱한 추억거리로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춤을 시작했다.
딱히 취향 같은 것은 없었기에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학원을 골라서 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그 학원은 동네에서 유일했다. 종목은 골반에 윤활유를 끼얹은 듯한 현란한 동작의 향연, 밸리댄스였다.
학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수업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무작정 결제했다. 한번 보고 결정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보면 망설여질 것 같아서.
골반을 삐걱거리며 열심히 춤이라는 것을 배운지 반년이 되던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혹시 연말 페스티벌 나가실 회원님 계실까요?”
거기에 나는 또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말이 페스티벌이지 사실은 수강생 어른이들의 재롱잔치였다. 관객은 가족들. 나의 관객은 딱 한 명이었다. 나를 이 세계로 밀어 넣은 바로 그 남자친구. 나는 그에게 결투장 같은 초대장을 보냈다.
‘반년 전 너의 질문에 대답해줄게. 00월 00일 00시에 00홀로 와.’
재롱잔치에 가족들은 초대하지 않았다. 아직 보여줄 만한 실력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았다. 양심이란 것이 있었기에. 영원히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언제 그 실력이라는 것이 생길지도 확신이 전혀 없었으니까.
공연 시작 전 난생처음으로 청심환이라는 것을 먹었다. 그리고 그것이 근육은 풀어줄지언정 긴장감을 풀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감으로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다리 근육도 풀려서 몸은 무너질 것 같았다. 막상 무대에 오르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믿어보았건만.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얼굴로 웃느라 안면 경련을 일으키며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그때는 그저 무대에서 살아서 내려온 것만으로도 무사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때까지 남자친구의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나는 덕분에 그의 흐뭇한 시선과 꽃다발을 받아낼 수 있었다. 어쨌든 해냈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의 재롱잔치를 더 했고, 골반이 어느 정도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회라는 것을 나가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장려상, 몇 번의 우수상, 두어 번의 최우수상 그리고 한 번의 대상. 그동안 어깨에 한 번, 발등에 한 번씩 위아래로 사이좋게 부상을 입어 정형외과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보다 못한 의사 선생님께서는 피부과 다닐 나이에 왜 자꾸 정형외과를 오느냐고 물어보셨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셨던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밸리댄스를 한다고 수줍게 고백을 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그 고백이 자부심이었건만, 그 말을 들은 의사 선생님의 벙찐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화려한 취미생활을 시작한 지 3년 후, 나는 밸리댄스 강사 자격증이라는 이색적인 자격증을 취득했다. 다시 3년 후, 나를 밸리댄스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준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그이와 똑 닮은 첫아이를 출산했다. 내 화려한 취미생활은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다시 밸리댄스를 시작한 것은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반년 후였다. 기어 다니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지금 여섯 살이니 재개한 지 4~5년쯤 됐으려나. 지금은 학원의 수강생 신분이 아닌, 용인과 광주에서 소정의 수고비를 받으며 공연을 하고 있다. 그러니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딱히 사치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으로 보면 엄연한 사치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두 아들의 엄마니까. 평범한 전업주부의 일상의 사치. 지금은 남편이 된 그이의 호기심을 나는 15년째 풀어주고 있다. 나는 무려 춤추는 엄마다.
김민희 춤과 책과 맥주를 좋아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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