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11월 우수상 - 고마운 어른의 모습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
어린 손을 다정스레 배웅하던 고마운 선배의 그 넓은 손길을 닮은 어른이 되어 가고 싶다. (2020.11.04)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다가 유재석 씨가 한 어린이에게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잖아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질문하는 장면을 보았다. 어린이는 “솔직하고 착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단숨에 대답하는 어린이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된 나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었지?’ 대답 대신,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했던 고마운 선배가 떠올랐다.
선배는 재작년, 학년 부장님으로 만났다. 대구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근무지를 바꾸면서 달라진 교직 문화에 한창 부적응하던 때였다. 서울 사람들은 왜 그리도 차가운지, 개인주의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 많았다. 동학년 회의를 하면 많은 인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말을 하곤 해 회의가 끝나면 비몽사몽한 상태가 되었다. 가장 나이 어린 내가 말 붙일 틈이 없었다. 차가운 전쟁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좁은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에 왔는지, 사무치는 외로움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런 내게, 선배는 먼저 다가와 주었다. 좋은 연수나 수업 아이디어가 있으면 불러서 소개해 주고, 교내독서모임을 제안해 한 달에 한 번씩 책에 관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어떤 때는 독서 모임 선생님들과 윤동주 문학관을 견학하고, 부암동의 단풍을 구경하기도 했다. 나는 서울과 그 근방을 조금씩 알아갔고 나의 작은 말들에 귀 기울여 주는 선배 덕분에 서울에서도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 붙이고, 정붙이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선배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2년 동안 선배는 서두르지 않고 내가 가진 장점이 피어날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지원해 주었다.
하루는 선배가 아이들이 하교한 나의 교실을 방문했다. “집 구하는 것은 잘 되어가나요?” 그때 나는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대로 받고서는 일주일 만에 2kg이 빠진 상태였다. 원룸 보증금을 돌려준다던 집주인이 말을 바꾸어 보증금을 못 돌려준다고 했다. 이미 새로운 방을 구해 가계약금을 넣은 상황에서 계약을 철회하고 가계약금을 날려야 했다. 사람에 대한 불신과 주거지에 대한 고민으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선배는 내게 이 상황을 부모님과 의논해 보았는지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고 내가 위로를 구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었다. 살아 내는데 바쁜 부모님께 나는 희망이자 기쁨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1등을 했어요.”, “반장이 됐어요.”라는 말을 전하기는 쉬웠지만 오늘 친구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학교에서 힘든 점이 무엇인지는 나누기 어려웠다. 항상 좋은 일만 전하던 내가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들고 어려운 점을 나누게 되면 부모님은 나보다 더 힘들어하셨다. 고통은 나누니 반이 되지 않고 배가 되었다.
선배는 자신의 예를 들어가며 어려운 일을 부모님과 나누는 방법에 대해 오랫동안 설명해 주었다.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겉돌면 마음이 공허해져요.”
부모님에 대해 고마움보다 부채감을 더 크게 느끼는 내게, 선배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고마워요. 제 몫 안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잖아요. 독립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으로도 대단한 일이에요.”
지금은 교직을 떠난 선배를 생각하면 양손에 1학년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해사하게 웃으며 하교 지도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선배가 먼저 내밀어 준 손 덕분에 나는 이제 얼어있는 신규 선생님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인사를 건네어 보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나누어 보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여 본다. “따뜻한 시선으로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봐주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지지하고 지원해 주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이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되고 싶었던 모습의 어른이 되는 것은 앞으로의 일일 것이다. 어린 손을 다정스레 배웅하던 고마운 선배의 그 넓은 손길을 닮은 어른이 되어 가고 싶다.
한송이 오랜 시간 글을 쓰며 저를 들여다보았더니, 어느 순간 제 삶을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참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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