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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1월호 틈입하는 편집자, 열한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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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소리소문을, 저의 부끄러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2019.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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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의 시구이겠으나, 저는 당신들의 문장으로 간직하고자 합니다.

 

소리소문의 작가님들께,

 

제법 긴 휴가를 얻어 가족들과 제주도를 다녀왔어요. 우리는 가급적 일정을 최소화하기로 했고, 우리의 시선과 발길을 사로잡는 곳에 오래 머물기로, 그곳에서 서로를 향한 최선의 마음을 쏟아내기로 다짐하였지요. 여행 중 하루는 태풍이 지나가서 꼼짝없이 숙소에 머물러야 했어요. 새벽부터 정오 즈음까지 그 일대에 전기와 물이 끊겼는데도, 아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온종일 보내야 했던 그날도 참 즐거웠다고 해요. 그러니 이번 여행은 성공적이었던 같아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내가 저에게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냐고 물었는데, 저는 많이 망설였답니다. 처음엔 해군기지 건설로 부서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도 다시 가보고 싶었고, 그곳에서 책을 만들기 위해 취재하던 시절에 인연을 맺은 분들도 뵙고 싶었고,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제주도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 옛 동료와 지인들도 만나고 싶었지요. 그러나 저는 이번 여행에서 책과 출판에 관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싶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은 제주에서 읽을 책들도 잔뜩 싸 들고 떠나왔지만 정작 저는 거의 책을 읽지 못했어요.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 가슴부터 아파왔거든요. 할 수만 있다면 잠시라도 책과 출판으로 인한 오랜 피로와 상처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작가님들이 계신 곳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어요. 작가님들의 이야기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내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흔쾌히 동의해주었지요. 태풍이 지나간 후, 작가님들이 계신 곳, 제주시 한림읍 중산간서로 4062, ‘소리소문小里小文’이란 이름의 작은 책방을 찾아갔어요. 이른 아침에 찾아가서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책방 마당을 서성이다가 작가님과 마주쳤을 때, 우린 서로를 바로 알아봤지요. 간혹 제가 만든 책을 보내드리기도 했었지만, 우리는 그저 페이스북으로만 교유하던 사이였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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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이는 소박한 햇볕이 스민 책상에서 필사를 했습니다.

 

 

실은 저는 오래전 작가님들의 책을 만들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작가님들께 드릴 출간제안서를 만들던 중 다른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작가님들의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얼마 후 작가님들의 책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  가 출간되었어요. 작가님들의 편집자가 되지 못한 건 속상한 일이었지만 작가님들의 독자로서도 충분히 행복했답니다. 절판된 책을 수소문하다가 인연을 맺은 서점 직원과 손님의 사랑 이야기도, 결혼하자마자 희귀 병 진단을 받았으나 ‘살기 위해’ 치료가 아니라 세계여행을 떠난 두 분의 이야기도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세계여행 그 이후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서 작가님들의 페이스북을 열독하던 독자가 되었지요.

 

소리소문을 찾아가기로 한 건 여행 일정을 궁리하던 한 달 전쯤 작가님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 여태껏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어요. “서점에서 일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늘어가는 것은 전문성이나 노하우, 아량 같은 것들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 교만한 것들만 늘어감을 느낍니다”라고, 그러면서 “출판사와 동네서점의 다른 가치와 철학을 폄훼해서 더욱 미안합니다”라고 작가님은 쓰셨지요. 저는 작가님들을 찾아 뵙고 그 문제의식은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미안해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서점이 아닌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아니 무엇보다 독자로서 말입니다.

 

서울에도 동네서점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곳들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새로운 서점들이 생겨납니다. 간혹 동네서점에 갈 때면 가슴이 서늘해질 때가 있습니다. 출판사와 서점 간의 공급율과 거래 방식, 재고 관리, 자본시장에서의 경쟁력 등 숱한 문제가 먼저 떠오릅니다. 수준 높은 큐레이팅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가능성은 여전히 위태롭겠지요. 출판사들은 지속 가능한 출판시장을 위해서라도, 동네서점을 하나의 홍보 수단으로 여기는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공생의 길을 찾는 출판인이라면 마땅히 소리소문과 같은 서점을 찾아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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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쪼록 오래오래 그곳에서 ‘딴 길’을 내시길 빕니다. 

 

 

책방 소리소문은 한 쪽 벽에다 당신들이 좋아하는 책들을 뜯어내어 벽지처럼 붙여놓았는데, 그중 천상병 시인의 시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한 시구 밑에 작가님이 직접 디자인했다는 소리소문의 도장이 찍혀 있었지요. 이는 천상병의 시구이겠으나, 그날 이후로 저는 당신들의 문장으로 간직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책은 사랑하겠다는, 행복하겠다는, 살아내겠다는 다짐을 ‘내일’의 기약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의 실천으로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딴 길’ ‘간다’라는 단어 하나하나를 바로 당신들의 ‘소리소문’이 증명해내고 있는 까닭입니다.

 

소리소문에서의 즐거웠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립니다. 아내는 평소 눈여겨보았던 책을 골랐고, 큰아이는 소박한 햇볕이 스민 책상에서 필사를 했고, 작은아이는 서가에 꽂혀 있던 제가 만든 책들을 자꾸만 끄집어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거듭거듭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만든 책들을 찾아내던 작은아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를, ‘오늘’을, ‘딴 길’을, ‘간다’를 살아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었을 겁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저의 자리, 책의 마음들이 있는 곳을 바라봅니다. 천상병의 시구를, 당신들의 소리소문을, 저의 부끄러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모쪼록 오래오래 그곳에서 ‘딴 길’을 내시길 빕니다.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당신들의 안부를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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