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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칼럼] 풍경과 만두와 시집서점과
<유희경의 이달의 시집서점> 첫 회 칼럼 제목 = 가네코 미스즈 시집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제목 변용
계단에서 나는 소리로 독자가 온다는 것을 안다. (2019. 07. 15)
풍경風磬을 선물 받았다. 바람 앞에 두어야 할 물건이다. 마땅치 않다. 고민하다가 에어컨 앞에 달아놓았다. 바람의 양도 방향도 일정한 만큼 너무 자주 울릴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우려와 달리 흔들림의 정도가 매번 다른 모양이다. 잠잠하다가 생각지 못할 때 한 번, 이따금 두 번 운다. 느리고 작은 종소리는 참 깨끗하다. 방금 또 딸랑, 하고 울었다. 나는 일을 멈추고 턱을 괸 채 다시 한 번 소리를 기다린다. 그 소리가 내 작은 시집서점을 구석구석 말끔히 닦아주기 바라면서.
사람들은 내가 앉아 있는 이 서점을 ‘위트 앤 시니컬’이라고 부른다. 3년 전에 신촌기차역 근처에 문을 열었다. 때맞춰 개업한 카페 한구석이 서점 자리였다. 시집은 얇으니 큰 공간이 필요 없겠다는 계산이었다. 좋아하는 시집들, 중요한 시집들 하나하나 골라서 차곡차곡 쌓아가듯 들여놓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겁도 없이. 시집서점이라는 게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별다른 홍보가 없었는데도 사람들이 찾아왔고 인터뷰 요청도 많았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몰랐으니까. 몰랐으므로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3개월 정도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이 수그러들었다. 마침내 한산해져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진 뒤에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정작 그것이야말로 정말 걱정거리라는 것은 까맣게 몰랐다.
나는 계단에서 나는 소리로 독자가 온다는 것을 안다. 가끔 찾아와 오래 머물러주는 사람이다. 시집을 고르는 이의 뒷모습은 따뜻하다. 나는 그 온도를 좋아한다. 좋은 시 한 편을 눈에 담을 때, 그 순간의 것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어떤 시집을 책장에서 집어내고 도로 놓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다시 하고 있던 일로 돌아간다. 서점에는 많은 일이 있다. 접고 자르고 그리고 붙이고 입력하는 일만으로 하루가 간다. 언젠가 반나절 동안 곁에 앉아 내 일을 지켜보던 친구는 이건 가내수공업이잖아, 라고 했다. 청소를 마치고 커피를 내려놓은 다음, 종일 독자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 게 서점지기의 일 아니었나. 아니었다. 나도 몰랐지.
위트 앤 시니컬이 신촌기차역 앞에 머문 시간은 2년 3개월이다. 같이 있던 카페가 폐업을 결정하는 바람에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좋든 싫든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단숨에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버렸다. 막막해졌을 때, 혜화동로터리의 오래된 서점 동양서림의 최 대표를 만났다. 최 대표는 서점의 리뉴얼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한 건물에 서점이 둘 있는 게 안 될 이유는 뭔가 싶어졌다. 마음만 맞는다면 두 서점 모두 월세도 인건비도 절약할 수 있을 거였다. 갈 곳을 잃은 서점과 새로움이 필요한 서점 둘이 함께하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고르기를 마친 모양이다. 내민 시집을 계산하고 있는데 독자는 불쑥,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린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되어버린 모양이구나. 제가 좋아하는 만두집이 이 근처에 있는데, 하더니 가방을 열어 검은 비닐봉지를 꺼낸다. 더운 만두 냄새가 훅- 끼쳐온다. 드시라고 하나 포장해왔어요. 봉투를 받아들며 당황한다. 매번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을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작, 저도 만두 좋아해요. 하고 우물거린다. 그새 독자는 계단을 또박또박 걸어 내려가고 있다. 던지듯 급히 전한 감사의 인사는 닿지도 못하고 데굴데굴 굴러가버린 모양이다. 그 역시, 이 상황이 어색했을 거다. 나만큼이나.
위트 앤 시니컬의 새 주소는 창경궁로 271-1. 혜화동로터리 부근, 동양서림 2층이다. 예전에는 창고로 쓰였던 곳이다. 나선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에 올라왔을 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위트 앤 시니컬은 다락 서점이 되었다. 나선계단은 여전히 있다. 위트 앤 시니컬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것은 독자들이 한 칸 한 칸 걸어 올라설 때마다 삐걱거린다. 자리에 앉아서 나는, 누가 오고 가는 것을 소리로 듣는다. 그들이 애써 올라온 이곳이 아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길, 빠져나갈 때에도 그러하길 바란다. 그런 일이 이 세계에서 시가 하는 일과 닮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딸랑, 하고 풍경이 울린다. “바깥은 여름**”. 올 것 같더니 결국 비는 오지 않고 구름 보기 좋은 저녁이 되었나 보다. 나는 만두 냄새를 맡으면서, 저것을 어디서 먹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 풍경과 만두와 시집과 서점. 어쩐지 서로 하나 어울리지 않는데,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나는 이것 또한 시와 같다고 우기고 싶다. 할 일이 가득이지만, 제법 한가로운 풍경이다.
** 김애란 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제목 인용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7년 신작희곡페스티벌에 「별을 가두다」가,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되며 극작가와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 있으며 현재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고 있다. 시 동인 ‘작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