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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궁리 끝에 탄생한 '니은서점'
사회학자 노명우의 니은서점 탄생기 (1)
우리는 ‘다소 오래된 고민’과 ‘다소 절실한 고민’ 그리고 ‘다소 엉뚱한 고민’이 모인 그 곳을 <니은 서점>이라 부르기로 했다. (2018. 07. 13)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이자, 책을 쓰기도 하는 작가이지만 서점을 차린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 없었다. 단지 맥락이 다른 세 가지 고민이 있었을 뿐이다.
다소 오래된 첫 번째 고민은 이랬다. 2015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년 2개월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대단한 지위를 누리지 않았던 평범한 분들이었기에 장례식 역시 평범했다. 장례 절차는 관습을 따랐다. 상주가 되어 문상객을 맞이했고, 문상객들은 부모님이 멀리 떠나는 길에 노잣돈이라도 하라며 조의금으로 슬픔을 표현하셨다. 장례비용을 정산했더니 약간의 조의금이 남았다. 함부로 쓸 수 없는 돈이었다.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되면 돌려받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돈을 빌려주시던 아버지이셨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자였기에 당신의 재능과 무관하게 교육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하셨다. 배우려는 의지는 강하지만 가난이 그 의지를 막고 있는 사람을 알게 되면 어머니는 돕고 싶어 하셨다. 이런 부모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그 돈으로 장학기금을 조성할 수 있으면 좋았겠으나 그러기에는 부족했다. 잠정적으로 그 돈을 더 의미 있는 계획을 마련할 때까지 보관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 돈을 ‘레인보우 펀드’라 불렀다. ‘레인보우 펀드’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1950년대에 운영하셨던 <Rainbow Club>에서 따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유난히 따르던 손자와 손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전에 매달 드리던 용돈을 레인보우 펀드에 적립했다.
두 번째 고민의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자와 손녀들이다. 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이 시대의 평균적인 삶이 그러하듯이 고용이 안정적이지도 않고 넉넉한 보수를 받는 처지도 아니다. 삶의 불안정성이 이들을 힘들게도 하지만 그들은 대학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회인이 되자 점점 지식과 책의 세계로부터 멀어짐을 아쉬워했다.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늘 머리 속에 있지만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너무 복잡해서 책을 읽을 수 없었고, 퇴근하면 몸이 너무 피곤해서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주말이 되면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느라 책 읽기는 뒷전이었다. 이런 식의 삶에서 아쉬움을 느끼기 시작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자 손녀에겐 삶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고 자극이 되어 생업을 유지하면서도 책의 세계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방법을 이들은 고민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자, 절실한 고민을 하는 조카의 삼촌인 사회학자인 나에겐 다소 엉뚱한 고민이 있었다. 글 쓰기는 외로운 노동이다. 그래도 책이 출간되면 누군가 내 책의 독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외로운 과정을 견디곤 한다. 탈고 한 후 편집자의 정성과 전문성을 통과해 마침내 책으로 출간되면 이러저러한 행사가 기획되고 독자와 만날 기회는 생긴다. 그렇지만 출간 행사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늘 있었다. 출간 행사와 같은 이벤트적 만남이 아니라 독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더 예민한 촉수를 지닐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민했다.
우연히 가족 식사 자리에서 세 가지 고민이 만났다. 세 가지 고민을 꺼내놓고 우리는 궁리를 시작했고 궁리 끝에 서점이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우리는 ‘다소 오래된 고민’과 ‘다소 절실한 고민’ 그리고 ‘다소 엉뚱한 고민’이 모인 그 곳을 <니은 서점>이라 부르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삼거리 노씨네라 불렀다. ‘노씨네’에서 니은(ㄴ)을 따와서 만든 이름이다. <니은 서점>은 사적으로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뜻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책에 담겨 있는 지식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기대하는 ‘삼거리 노씨네’ 손자와 손녀들의 소망이 담긴 공간이다. 그리고 <니은 서점>은 세상사람들과 같이 공부하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연구실에 고립되어 있던 사회학자의 책상이 옮겨진 장소이기도 하다. <니은서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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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