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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한 역사 배경 위에 그린 아름다운 청춘 연애담 <그 해, 여름>

1969년 여름, 3선 개헌 정국의 혼란과 연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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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해. 여름>은 권력이 연좌제로 개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던 1960년대 말, 이념 문제를 이용해 장기 집권을 꾀한 당시 독재정권의 야욕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뒤틀리게 했는가를 보여준다. (2018.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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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 해, 여름>의 한 장면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대학생들이 소위 농촌봉사활동(이하 농촌활동)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농촌활동은 학생들이 순수하게 농촌 일손을 돕는 경우도 있었지만 낙후된 농촌을 계몽한다는 취지나 농촌의 의식화를 도우면서 농민운동을 지지하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한 1970~80년대의 활동 등 여러 경우가 있었다.


우리나라 농촌활동의 역사는 일제 시기 ‘브나로드 운동’(‘민중 속으로’라는 뜻으로 1870년대 러시아에서 일어난 농촌 계몽 운동. 우리나라에서도 1930년대에 크게 성행하였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보니 순수한 일손 돕기보다는 계몽이나 의식화에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농촌활동을 ‘농활’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였다.


여름방학이면 학교 단위나 단과대 혹은 과단위로 농활을 떠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농활에 대해 농촌 사회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환영할 때도 있고 배척할 때도 있었다. 농활 자체는 20대 청춘들이 집을 떠나 농촌이라는 자연 속에서 벌이는 단체 활동이다. 그만큼 낭만적인 요소도 많고 육체노동에 겸해 계몽과 의식화라는 신념이 결부되면서 열성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런 농활에 대한 추억담에 섬세한 감성을 더해 만든 영화가 <그 해, 여름>(감독 조근식, 2006년 작)이다. 이 영화는 얼핏 청춘남녀가 나눈 아름다운 한여름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나 영화 속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 사건은 그렇게 감상적이지도, 마냥 아름답지만도 않다. 

 


영화의 배경, 1969년

 

<그 해, 여름>에는 달 착륙을 중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것이 1969년 7월이었으니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정확히 1969년 7월이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체제 우위를 선전하기 위해 우주경쟁을 벌이던 1960년대 말.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간에 냉전이 계속되던 때였기에 분단국인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는 더욱 경직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윤석영(이병헌 분)의 아버지가 정부 고위관리로 나오는데 그는 아들에게는 고압적이고, 사회적으로는 권위적이며, 정치적으로는 폭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실제로 당시 정권을 떠받친 고위 관료들은 5.16 군사쿠테타에 참가한 군인 출신이 많았고 군대의 상명하복 조직 문화를 정치권에 그대로 가져와 대한민국 전체를 마치 군대처럼 운영하였다. 그것도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 초법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면서 말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인 1969년 여름은 대통령 박정희가 헌법을 개정해서 세 번째 대통령이 되기 위한 작업을 하던 때였다. 장기집권으로 가는 쐐기를 박으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개정한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직은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로 되어 있었다. 1969년은 대통령 박정희가 제3공화국 헌법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 재선에 성공, 두 번째 임기 중인 때였다. 말하자면 2년 후엔 대통령직에서 영원히 물러나야 함을 의미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얻은 권력을 내려놓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대통령직을 유지하고자 했다. 자기가 만든 헌법을 자기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었지만 장기집권을 위해서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한 명분을 찾아 나섰다. 명분은 결국 당시 국제적인 냉전 분위기와 분단 상황에서 찾았다. 즉, 북한의 도발 위협이 강해지는 때인 만큼 박정희의 강력한 지도력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정권 연장이라는 정치적 안정을 통해 경제개발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박정희와 집권 공화당의 개헌논의는 즉각적으로 국민과 언론의 반발을 샀다.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야당과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반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우익단체들이 나타나 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두 세력 간의 갈등, 그리고 시민, 학생들의 시위는 1969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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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선 개헌 반대시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화 <그 해, 여름>은 3선 개헌 시도와 이를 둘러싼 저지투쟁이 한창인 어수선한 시절, 세상을 잠시 잊고 시작한 한 남녀의 풋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도시의 고위직 자제인 석영과 월북한 아버지 탓에 위축되어 살아가야만 하는 농촌 마을의 도서관 사서 서정인(수애 분)의 사랑은 결코 역사와 시국에 무관할 수 없었다.

 


월북자 가족에 대한 연좌제의 폐해

 

영화에서 여주인공 서정인은 월북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숨죽이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녀의 아버지는 수재이자 지식인으로 마을의 자랑거리였으나 한국전쟁 와중에 남이 아닌 북을 택해 월북했다. 마을 사람들은 서정인의 아버지와 안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정인의 아버지가 세운 마을 도서관을 외면해왔고 정인의 삶을 가여워하면서도 정인과 연루되면 화가 미칠까 다들 그녀를 백안시한다. 정인 또한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려 한다. 월북자 가족인 정인에게 연좌제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서울에서 온 철없는 젊은이 석영은 정인이 짊어진 가족과 역사의 무게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청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1969년 여름의 혼란스러운 시국과 연좌제로 헤어지게 된다. 


연좌제는 원래 그 역사가 매우 깊다.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 책임을 물리고 처벌한 것이 연좌제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시대까지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역모(逆謀: 반역을 꾀함)가 발각되면, 친인척인 ‘삼족(三族)을 멸한다’가 대표적인 연좌제라고 할 수 있다. 삼족은 부계(父系), 모계(母系), 처계(妻系)를 통틀어 이른다. 전근대 시기 연좌제는 친인척에 국한되지 않고 교우관계나 고향에도 적용되었다. 반역자가 나온 마을은 군(郡)에서 현(縣)으로 강등되는 등 마을 전체가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연좌제는 근대법이 시행되고 개인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사라졌지만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꽤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 속 서정인의 아버지처럼 월북자가 있으면 그의 친인척뿐 아니라 그와 교우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마저 사상을 의심받고 이유 없이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거나 법적 또는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정인의 마을 사람들도 과거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곤란을 겪었기에 모두 정인을 가까이 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 연좌제는 1980년 개정된 헌법에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는 규정이 신설되기 전까지 공공연하게 지속되었다. 신원조회에서 월북자나 사상범의 가족 또는 친족임이 밝혀지면 고급공무원으로 임명되지 않거나, 해외여행과 출장까지 제한받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월북자는 언제든 간첩으로 내려올 수 있다고 보았고, 월북자 가족은 간첩이 된 월북자들을 도울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월북자 가족은 접촉하면 안 될 감시의 대상이자 그들과 친교를 가지는 것 또한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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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3월 연좌제 폐지에 대한 기사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월북자 가족은 평생을 쥐 죽은 듯 살아야 했다. 직업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사람들과 사귀는 것도 어려웠다. 영화에서도 정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지만 그렇다고 마을을 떠날 수도 없다. 그나마 감시를 받는 와중에도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이 정인에게는 안전했던 것이다. 마을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다 한들 그녀를 따라붙는 감시와 부당한 대우는 더하면 더했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영화에서 정인이 석영을 따라 나선 것은 그야말로 인생을 건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1969년 당시는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북한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던 시기였고 당시 정권이 그런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좌제의 서슬이 더 시퍼렜다.


연좌제는 1980년 개정된 헌법에서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금지되긴 했지만, (이 또한 상당히 문제가 많은 조항이기는 하다. 이전의 헌법에서는 연좌제에 대한 조항이 없었다. 근대법에서 연좌제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에서 연좌제가 공공연히 존재해왔던 것은 사실이고 이를 1980년 헌법에서 금지한다고 규정한 것인데 어떤 의미로는 이 조항이 들어가면서 이전의 연좌제를 법적으로 인정한 부분도 없지 않다.) 이후에도 때로는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종북’이니 ‘친북’이니 하는 말도 따지고 보면 이 연좌제와 관계가 깊다.

 

영화 <그 해. 여름>은 권력이 연좌제로 개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던 1960년대 말, 이념 문제를 이용해 장기 집권을 꾀한 당시 독재정권의 야욕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뒤틀리게 했는가를 보여준다. 개봉 당시 아름다운 화면과 연애담으로 가벼운 청춘물로 여겨졌지만, 1960년대 말의 엄혹한 시대상을 에둘러 다룬 역사 영화로서 의미가 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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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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