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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도 패자도 없이 오직 죽은 자뿐이었던 <고지전>
정전협정을 앞두고 의미 없는 소모전에 희생된 남과 북의 병사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간은 휴전을 위한 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한쪽에서는 전쟁을 끝내자는 회담을 진행하면서 한쪽에서는 서로 총칼을 겨누고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 대부분의 병사들은 오늘이라도 회담이 성사되면 죽지 않을 목숨이었던 셈이다. (2018. 07. 02)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최근 한반도는 종전선언 추진과 이를 계기로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종전협정이라면 전쟁을 끝낸다는 의미이기에 “그동안 우리가 전쟁 상태였던가?” 하고 새삼 놀라기도 한다. 지난 65년간 구체적인 위기를 불러올 전쟁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이 잊고 있지만 1953년 이래 한반도는 전쟁이 끝난 것(종전)이 아니라 전쟁이 잠시 멈춘 상태, 즉 정전 상태였다.
남북 정치 상황과 세계정세 변화로 대치의 원인이었던 이데올로기는 희미해졌지만, 65년간 남북은 한결같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정전 상황을 질질 끌어왔다. 이제 더 이상 생산적이지도 않고 명분도 없는 정전 상황을 청산하는 것이 한반도, 나아가 세계 전체에 유익할 것이다.
정전협정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지 3년만인 1953년 7월 27일에 맺어졌다. 한국전쟁은 최초 1여 년 간은 전선이 급변하는 전면전의 형태였지만 나머지 2년여는 애초에 그어졌던 군사분계선인 위도 38선을 오고가며 국소적 형태의 전투가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교착전 양상을 띠었다. 정전협정이 맺어지기 직전까지 주요한 고지를 뺏고 뺏기면서 서로의 병력과 화력을 소모해갔던 것이다. 영화 <고지전>(감독 장훈, 2011년 작)은 바로 이 정전협정이 맺어지던 1953년 7월 27일 직전, 고지 하나를 두고 서로 대치하다 희생되어간 남과 북 병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애록고지의 모티브 백마고지전투
영화의 주요 무대는 동부전선의 애록고지인데, 이 고지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고지이다. 애록이라는 이름은 KOREA를 거꾸로 적은 AEROK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1951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 이후 한국전쟁은 38선을 오가는 다발적 국지전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 국지전에서 희생된 병사의 수가 300만 명에 달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병사의 수가 총 400만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전쟁의 양상만 전면전이 아니었을 뿐 1952년과 53년에 치러진 전투는 전면전보다 더 처절하고 참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간은 휴전을 위한 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한쪽에서는 전쟁을 끝내자는 회담을 진행하면서 한쪽에서는 서로 총칼을 겨누고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 대부분의 병사들은 오늘이라도 회담이 성사되면 죽지 않을 목숨이었던 셈이다.
많은 수의 한국군은 대부분 고지전에서 희생되었다. 영화에서도 애록고지는 오전에 빼앗았다가 오후에 빼앗기고 밤에 다시 빼앗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전쟁 당시 고지전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애록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남과 북이 대치하던 수많은 고지를 상징하지만 특별히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중서부 전선의 백마고지전투에서 주요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영화는 극적인 전개를 위해 애록고지 전투가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바로 앞두고 북한 병을 상대로 치러졌다고 설정되었지만 실제 백마고지전투는 그 이전인 1952년이었고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백마고지전투가 애록고지의 모델이 된 것은 단 열흘간 24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 전투였기 때문이다.
백마고지는 현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에 있는 395미터 정도의 야트막한 고지로서 고지의 높이를 따서 395고지라고도 한다. 현재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다. 이 고지의 이름이 백마고지가 된 것은 치열한 고지전의 결과로 산등성이가 극심한 포격에 의해 하얗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누운 듯하여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1년간의 전쟁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소모전만 이어가던 한국전쟁은 1951년 7월부터 정전협정을 맺기 위한 회담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의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는 북한 측에 반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는 유엔군의 주장으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정전협정 전에 확보하려 한 양측은 한편에서는 회담, 한편에서는 전투를 이어 나갔다.
당시 백마고지는 한국 제 9사단이 방어하는 지역이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고 남하하기 위해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해오면서 일명 백마고지전투가 시작되었다.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을 방어해내지 않으면 어디까지 밀릴지 모를 상황이었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면서 치러진 전투상황은 처참했다. 하루에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전투로 아군과 적군 모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백마고지전투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가운데 끝내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하였다. 한마디로 작은 산 하나를 포탄으로 초토화시켜버린 것이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를 내고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한국군의 손실도 커서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한 제9사단. (출처: 국방일보)
정전협정 전후
영화 <고지전>에서 애록고지의 병사들은 전쟁을 위한 전쟁에 희생되다가 마침내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도 모를 위험한 균형 상태에 놓인다. 판문점에서 하루라도 빨리 정전협상이 맺어져 이대로 총을 놓고 싶은 병사들은 무리한 전투를 명령하는 중대장을 죽여 버리고 위태로운 평화를 이어간다. 그런 상황에서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 분)가 전임 중대장이 죽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파견된다.
유약해서 전사했으리라고 생각했던 친구 수혁(고수 분)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전쟁 베테랑이 되어 나타나 이 전쟁을 조롱하고, 19세의 어린 대위 일영(이제훈 분)은 자기가 살기 위해 아군을 사살하고 도망 나와 이 때문에 겪는 트라우마로 약에 절어 있다. 전쟁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듯했던 적군의 우두머리 현정윤(류승룡 분)은 이 전쟁을 왜 하고 있는지 답을 잊어 버렸고, 오로지 살기 위해 공포 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2초(김옥빈 분)는 한국군에게 되레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인 고지의 한가운데서 남북의 병사들은 서로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고 있다.
영화에서 수혁은 왜 빨리 정전협정이 맺어지지 않느냐며 분노한다. 3년간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 전쟁이 무의미하다고 알게 된 수혁에게 전쟁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다.
<고지전>의 병사들처럼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된 이래 전쟁터의 수많은 병사는 정전 소식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이미 전쟁을 끝내기로 양측 모두 동의했으면서도 회담은 여러 문제로 결렬되거나 연기되었다. 그사이 수많은 젊은 목숨이 이름 모를 고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전체가 서로 밀고 밀리는 전면전은 1951년 초반에 끝이 났다. 이후 몇 개월간 지루한 국지전만 계속되자 더 이상 소모전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정전을 원했다.
1951년 소련은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통하여 정전을 제의했고,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이를 받아들였다. 1951년 7월 8일 첫 정전 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회담은 전쟁에 대한 양측의 피로감에 비해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정한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공산군 측과 정전협정 당일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의 의견이 엇갈렸고, 포로교환 문제가 난항을 거듭했다.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8일 시작된 연락장교회의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무려 25개월이 소요되었다. 159차례의 본회의와 500여 회가 넘는 소위원회가 개최되는 등 너무나 지루하고도 힘든 과정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남한 단일 선거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통일을 주장하며 완강히 정전협정을 반대하며 방해공작을 펼쳤다. 그 25개월간 한반도 중부지방 각지의 고지에서는 한국군과 북한군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젊은 목숨이 스러져갔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과 중국 측 대표 남일(南日)이 3조 63항의 휴전조인문에 합의?서명함으로써 마침내 이루어졌다. 이로서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패배도 없이 초토화된 국토와 수많은 죽음을 남긴 채 그저 정전으로 끝맺는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조인하는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측 대표. (출처: 위키피디아)
군사분계선은 정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를 기점으로 하여 12시간 후인 밤 10시를 끝으로 각자가 차지한 땅을 서로의 땅으로 인정하고 긋기로 하였다. 영화 <고지전>의 엔딩에서 고지를 차지하게 위해 남과 북의 병사들이 그간의 위태로운 평화를 부수고 싸우는 장면은 바로 이 조항을 근거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영화는 극적 엔딩을 위해 1953년 7월 27일의 마지막 전투를 만들었지만, 실제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난 후 12시간 동안 남북 양측의 군사충돌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정해진 군사분계선이 바로 오늘날의 휴전선이다.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선의 후방 4킬로미터까지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으며,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이 긴 명칭에서 협정 당사자 중 한국의 군 통수권자가 빠져 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뒤늦게 통일을 주장하며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이러한 비외교적이고도 근시안적인 일탈 때문에 한국전쟁에 대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때에 한국이 당사자에 해당하는지, 안 하는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오늘날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을 때 미국이나 중국이 개입하려는 것도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정전협정에 근거한다.
영화에서 북한군 현정윤은 싸우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강은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래 그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영화 속 현정윤의 대사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현재 한반도의 현실이 이렇지 않을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이유가 분명 1950년 당시에는 있었을 테다. 이제 전쟁의 이유는 잊어도 무방하다. 종전 그리고 평화의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할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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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