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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에녹과 파헤친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열정과 끼로 가득한 에녹 배우
모든 에너지를 공연에 집중하니까 점점 삶이 좁아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2018. 07. 11)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이 공연되고 있습니다. 두 달 전 국내 제작진에 의해 첫선을 보인 창작뮤지컬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과 일본, 한국 등에서 제작된 영화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인지라 개막 전부터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는데요. 다행히 무대 위 <용의자 X의 헌신> 은 원작이 가진 스토리의 힘에 뮤지컬의 색채가 잘 버무려져 관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뮤지컬만의 매력이라면 라이브 무대와 음악, 조명, 그리고 두 시간의 극을 끌어가는 배우들이 있을 텐데요. 두 달 가까이 공연됐으니 배우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테고, 관객도 궁금한 게 많겠죠? 그래서 관객들을 대표해 공연이 시작되기 전 유카와 역의 에녹 씨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콜 시간보다 항상 일찍 오는 편인데, 오늘도 인터뷰 전에 극장에서 혼자 리허설을 했어요. 대사량도 많지만, 일상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서 말들이 어렵거든요. 토씨 하나만 틀려도 분위기가 깨지니까 늘 불안하고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에서는 유카와가 가장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재 물리학자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일단 대사에 나오는 ‘이론’들은 어떻게 소화하셨을까 궁금하더라고요(웃음).
“안 그래도 양자역학이나 사색도형문제, 클레이 수학연구소의 7대 수학 난제 등은 찾아봤어요. 모르면서 얘기할 수는 없으니까 배우들끼리 공유하고, 다행히 원작 소설이나 영화에도 잘 표현돼서 도움을 받았죠. 유카와 캐릭터는 저희 안에서도 얘기가 많았어요. 괴짜거나 뭔가 결핍이 있는 인물도 아니고, 사실 가장 표현하기 힘들고 매력 없는 캐릭터가 잘생기고 잘난 인물이거든요. 그런 척하면 안 되고 진짜 잘난 인물로 관객들이 믿어야 하니까 분장팀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죠. 유카와끼리 ‘어려운 거 하고 있다, 잘하고 있어!’라고 서로 응원을 많이 하는데, 신성록 배우, 송원근 배우 모두 각자의 색깔을 갖고 캐릭터에 접근했던 것 같아요.”
유카와는 해설자 역할도 해야 하니까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시가미나 야스코보다 감정선을 유지하기도 힘들겠더라고요.
“맞아요. 관객들의 시선을 좇게 만드는 역할이라면 좀 더 편할 수 있는데, 이야기 밖에 있는 인물이잖아요. 저희 작품의 구조가 그렇더라고요. 쿠사나기 형사는 유카와를 설명하고, 유카와는 이시가미를 설명하고. 그게 어렵기는 하죠. 제가 너무 캐릭터를 갖고 들어가면 극에 오히려 방해될 수 있고, 그렇다고 감정을 다 없애면 재미없을 수도 있고. 그 톤을 맞추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친구들한테는 이 극이 평양냉면 같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심심한데 먹고 나면 계속 생각난다, 분명히 여운은 남는데 보는 동안 자극적인 부분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소설이나 영화로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라 부담도 컸을 거예요.
“컸죠. 원작 소설이 워낙 짜임새 있는 데다 영화로도 잘 만들었거든요.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표현하기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깎여 나간 부분도 있고, 원작의 디테일을 살릴 수 없어서 힘들기도 했죠. 또 히가시노 게이노 팬분들이 많으니까 캐릭터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 원작의 캐릭터에 충실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무대에 오르니까 사람이 달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고, 창작진이 만들어준 음악이나 톤 때문에도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무엇보다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에는 음악이 있잖아요. 이시가미가 독백처럼 읊조리며 솔로로 7분을 끌고 가는 노래가 있어요. 바로 유카와가 이어 부르고요. 그런 장면은 뮤지컬에서만 만나고 느낄 수 있죠.”
배우로서 이시가미 역이 탐날 것도 같아요(웃음).
“하고 싶죠, 재연하면 이시가미를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했습니다(웃음). 캐릭터가 짙은 역할,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 재밌고 욕심나요.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때문인지 제 안에 있는 불타는 열정과 결핍은 잘 몰라주시는 것 같아서 속상해요. 안에서는 끓고 있는데 말이죠.”
불현듯 다음에 연기해보고 싶다는 이시가미의 행동이 개인적으로 이해되는지 궁금했습니다.
에녹 씨의 인간적인 답변은 영상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죠(웃음)!
현재 뮤지컬 <붉은 정원>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한 작품을 원캐스트로 쉬지 않고 공연하는 것과 두 작품을 번갈아 공연하는 것, 어느 게 더 힘들까 궁금하네요.
“두 작품을 하는 게 부담스럽죠. 관객분들을 만날 때도 혹시나 겹치는 부분이 생기거나 다른 작품에 영향을 미칠까봐, 그런 게 가장 예민하고요. 다행히 두 작품은 색깔이 너무 다르고, 음악 장르도 캐릭터도 확연히 달라요. <붉은 정원>에서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맡아서 제 나이도 실감하게 되더라고요(웃음).”
이렇게 두 작품을 함께 공연하면 1주일에 하루 이틀 쉴 테고, 저녁에 공연 있으면 그 전까지 뭔가 하는 데도 제한이 있을 텐데, 어떻게 지내세요?
“보통 혼자 놀게 되죠(웃음), 어쩔 수 없이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하게 돼요. 활동적인 걸 좋아했는데 몸을 다치거나 컨디션에 영향을 주면 안 되니까 점점 자제하게 되고요. 모든 에너지를 공연에 집중하니까 점점 삶이 좁아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반면 내 안에 있는 작은 씨앗을 키워서 만든 캐릭터를 통해 매번 다른 인물로 살아보는 재미도 있죠.”
1년에 많으면 4~5개 작품을 하실 텐데, 시간이 제한적이니까 이제는 어떤 방향, 어떤 느낌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올해는 좀 더 작은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가고는 있어요. 좀 더 세밀한 연기를 해보고 싶었고, 노래도 좀 더 디테일하게 부를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을 하고 싶었거든요. 배우니까 캐릭터는 당연히 욕심이 있지만, 그보다 한 컴퍼니, 한 작품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고요.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작품 전체를 아우르면서 갈 수 있는 배우요. 그런데 요즘은 작품보다 개인적인 고민이 많아요. 서른 살 때는 몰랐는데, 내 삶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디자인해야 하나, 난 어디까지 왔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등등 생각이 많아졌어요. 가치관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둬야 하는지, 주위에서 일단 결혼부터 하라고 하네요(웃음).”
이러다 하반기에 결혼하시는 거 아닌가요(웃음)? 7월이 시작됐는데, 마지막으로 올해 하반기 계획을 들어볼까요?
“일단 <용의자 X의 헌신> , <붉은 정원> 공연 잘하고, 이후에 익숙한 작품으로도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음반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을에는 개인 앨범을 발표하고 싶어요. 올해 가장 큰 목표 중에 하나거든요. 10년 동안 남의 얘기를 해왔는데, 제 얘기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제가 쓴 곡도 있고 받은 곡도 있는데, 가사는 제가 다 썼어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내가 생각하는 사랑, 내가 바라보는 삶 등을 넣었는데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에녹 씨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4년여 전 <보니 앤 클라이드>로 그를 처음 인터뷰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인터뷰 내내 유쾌했던 건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그 인물로 보였던 에녹 씨가 이제는 작품 안에서 보인다고 할까요? 배우로서 열심히 달려온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채 드러내지 못한 그 안의 열정과 끼로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날도 기대해 보죠.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은 8월 12일까지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에서 공연됩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바라보다 어느 순간 쑥 빠져드는, 그렇게 만드는 배우들의 호연을 직접 감상해 보시죠!
관련태그: 용의자 X의 헌신, 배우 에녹, 유카와,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