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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의 나라, 일본과 독일

참모본부의 독립이 초래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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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였다.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는 이 문장의 실질적 의미는 참모총장이 군대의 통수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초대 참모총장은 물론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천황의 참모본부’가 실제로는 ‘야마가타의 참모본부’가 된 것이다. (2018. 02. 23)

일본 군대의 출발

 

일본 육군의 시작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가 시작했지만 그 형태와 내용을 결정지은 사람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다. 그는 여러모로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 야마가타는 조슈번(長州藩, 현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조슈번 출신과 사쓰마번(薩摩藩, 현 가고시마현) 출신 인사들의 독무대였다. 이를 가리켜 ‘번벌(蕃閥) 정치’라고 한다.

 

그 파벌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아베 신조(安倍 晋三) 총리는 조슈 파벌이고, 아베 이전의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는 사쓰마 파벌에 속한다. 아버지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중의원이 된 그의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또한 언젠가는 아버지를 이어 총리가 될 것이라고 예견된다. 이렇게 일본은 아직도 개화기 때의 파벌이 번갈아 정권을 좌우하는 희한한 나라다.

 

일본 열도의 서남쪽 가장 아래에 위치한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서양 문물에 가장 먼저 노출된 지역이다.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경험한 이 두 지역의 인사들이 봉건제하의 일본을 개혁하는 데 앞장서게 된 것이다. 이들이 봉건 개혁에 앞장선 또 다른 이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막부로부터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당시 ‘폐번치현(廢藩置縣)’, 즉 ‘번(藩)’ 단위의 봉건 영주제를 폐지하고 현 단위의 근대적 지방행정구역으로 전환하던 격변기에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드디어 에도막부를 제치고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된다.

 

개화기 조슈번 출신 인사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를 비롯해 우리에게 아주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총리를 역임한 가쓰라 다로(桂太郞, 1848~1913), 조선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게(寺內正毅, 1952~1919), 태평양전쟁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군신(軍神)’이라 불린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년~1912년), 현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등이 있다.

 

 

그림 1 - 이토히로부미.png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더불어 같은 조슈번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 군대 ‘통수권’을 정부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야마가타의 시도를 이토 히로부미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군대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속 편하게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의회와 정부로부터 일본 군대의 독립은 아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의 군대를 그대로 흉내 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군국주의’란 단어는 독일과 일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로 여겨지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또한 조슈번 출신이다.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크게 받아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소위 ‘유신 3걸’이라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1833~1877) 또한 조슈번 출신이다. 유신 3걸 중 다른 두 명, 즉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는 사쓰마번 출신이다.

 

사쓰마번 출신으로 언급할 만한 이로는 해군 대장 출신으로 총리를 역임했던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1852~1933), 해군 원수로 러일전쟁의 영웅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 등이 있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은 이순신 장군과 감히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뜨악한 겸양을 떨었던 이로도 유명하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정치뿐만 아니라 군대도 각기 다른 영역에서 주도권을 쥔다. 메이지 유신 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십 년간 육군은 조슈번이, 해군은 사쓰마번이 주도권을 쥐었다. 특히 일본 육군의 발전 과정이 흥미롭다. 일본 육군이야말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은 영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반면, 일본 육군은 독일 제국의 군 체제를 그대로 들여왔다. 일단 오무라 마스지로에 이어 일본 육군 건설을 책임졌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독일 육군에 능통한 자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자, 아리토모는 그 이듬해인 1969년 유럽의 군대를 연구하기 위해 독일 프로이센을 방문한다. 이때 함께 간 사람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1843~1902)다. ‘사이고 주도’라고도 불리는 그는 1877년 그의 형 사이고 다카모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계속 정부군에 남아 형의 군대와 싸웠다. 후에 그는 해군대장이 되었고, 해군 최초로 원수 칭호를 받았다. 사쓰마번 출신들의 해군 인맥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사이고 쓰구미치는 당시 유럽에서 강력한 군사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프로이센 군대에서 강력한 인상을 받는다. 당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이제 막 승리하고, 독일 통일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인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1870년 7월에 아리토모 일행은 유럽 시찰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같은 달 유럽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개시 후, 채 두 달도 못되어 프로이센군은 ‘스당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킨다. 나폴레옹 3세를 비롯한 10만 명의 프랑스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정은 이렇게 몰락한다.

 

 

그림2-독일작전 참모부.png

1870~1871년 독일 통일을 이룰 당시의 프로이센 작전참모부. 북독일의 작은 제후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승승장구하여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되는 육군 작전참모부의 공로가 결정적이다. 앞줄 가운데 팔짱 낀 이가 몰트케 장군(Helmuth Graf von Moltke)이다. 몰트케는 그의 부하인 클레멘스 멕켈 소좌(Klemens Wilhelm Jakob Meckel)를 일본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파견한다. 프로이센의 작전참모제도를 잘못 학습한 일본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매우 호전적인 육군을 가지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유럽 최고의 군대인 줄 알고 있었다. 1869년 프랑스군을 모델로 설립된 ‘오사카병학료(大阪兵學寮)’에서는 470명의 생도가 프랑스식 병술을 배우고 있었다. 오사카병학료는 1874년 도쿄에서 개교하는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생도들은 프랑스어로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프랑스 군대가 프로이센 군대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프로이센 군대의 힘을 직접 목격하고 온 야마가타는 일본 군대 시스템을 프로이센식으로 바꿀 것을 결심했지만 바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시작된 일본 육군의 요직을 프랑스식 군사제도에 익숙한 이들이 대부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가타의 프로이센 군사제도의 본격적인 도입은 수년 후에나 가능해진다.

 

 

독일유학파가 일본 육군을 장악했다

 

일본 육군의 대표적인 독일파로 또 한 사람이 있다. 가쓰라 다로(桂太郞)다. 가쓰라 다로는 1870~1873년 독일 유학 후, 1875~1878년과 1884~1885년에 독일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할 정도로 독일 정세에 밝은 사람이었다.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등용해 일본 군대의 독일화를 적극 추진했다. 야마가타 밑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총리대신까지 역임했다. 러일전쟁 후인 1905년 10월, 일본이 미국과 은밀히 맺은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의 ‘가쓰라’가 바로 이 사람이다. 가쓰라-테프트 밀약이란 러일전쟁에서 막 승리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이 인정하기로 하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일본이 인정하기로 자기들끼리 몰래 나눈 약속이다.

 

 

그림3-가쓰라 다로.png

가쓰라 다로(桂太郞). 그는 일본 육군 내 대표적 독일파였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독일 내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여러 해 근무했던 그는 프랑스 군대를 모델로 하던 당시 일본 육군을 독일식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는 후에 미국의 베트남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맞바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 된다.

 

 

일본군 내 독일파로 언급할 만한 또 한 사람은 노기 마레스케다. 그는 러일전쟁의 영웅이다. 당시 ‘해군에는 도고, 육군에는 노기’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해군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를 영웅으로 내세웠다면, 육군에서는 노기 마레스케를 영웅으로 선전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전략가로서 노기는 그리 대단한 전과가 없다. 오히려 패배의 전적이 더 화려하다. 세이난전쟁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해 천황이 하사한 연대 깃발을 뺏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는 당시 할복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참모장을 거쳐 장군까지 된다. 1887년, 장군이 된 후 독일에 유학하여 통일된 독일제국 군대의 전술전략을 공부하고 돌아온다. 청일전쟁 때는 여단장으로 출전했으나 그리 큰 전과는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쉬고 있던 노기는 3군사령관으로 출전한다. 이때 노기 마레스케를 아주 유명하게 만들어준 ‘203고지’ 전투가 벌어진다. 러시아 극동함대가 정박하고 있던 뤼순을 점령하기 위해 뤼순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 203미터의 작은 야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노기는 반복해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고지에 콘크리트로 요새를 만들고,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준비하고 있는 러시아군에게 육탄으로 돌격할 것을 명한 것이다. 공격할 때마다 그의 일본군 돌격대는 전멸당한다. 노기의 무모한 돌격명령으로 13만 명의 그의 병사들 가운데 6만 명 가까이가 사망하게 된다. 장교로 참전한 그의 두 아들도 이 전쟁에서 사망한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군은 203고지는 점령하지만, 노기 마레스케 사령관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은 걷잡을 수 없었다. 노기는 귀국한 후, 사임과 동시에 할복자살할 생각을 하지만 메이지 천황이 만류한다.

 

 

그림4-203고지영화.png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구 뒤쪽의 203고지 전투를 다룬 1980년의 영화 「203고지」포스터. 203고지 전투는 일본육군의 전매특허가 되는 ‘무모한 육탄전’의 효시가 된다. 당시 203고지 전투를 지휘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사령관은 전쟁 당시 할복자살을 결심할 정도의 격렬한 비난을 받는다. 자신의 13만 병력 중 절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그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다. 일본에서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자살이다. 메이지 천황이 죽자, 자신의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한 것이다. 노기를 기리는 신사가 서울 남산에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노기는 전쟁영웅이 된다. 아들 둘을 모두 전쟁에서 잃었다는 사실이 일본식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적극 홍보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 노기는 귀족 자제들의 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의 원장이 된다. 가쿠슈인에서는 쇼와 천황을 비롯해 일본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교육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후에 설명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를 비롯한 시라카바파(白樺派)의 문인들도 노기가 원장으로 있던 시절의 가큐슈인 출신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었던 대표적 문인들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본 육군의 상징인 노기 마레스케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노기 마레스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사건은 그의 할복자살이다. 그가 그렇게 여러 번 시도했던 할복자살을 끝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주 흥미롭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그는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했다. 장군으로서 그의 체면을 끝까지 지켜준 메이지 천황에 대한 마지막 충성이었던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무모했다. 그의 죽음을 일본 사회는 여전히 우상시하며 그를 ‘군신(軍神)’으로 섬긴다. 실제로 그를 추모하며 섬기는 노기 신사(乃木神社)가 지금도 도쿄 한가운데 있다. 일제 강점기 서울 남산에는 그의 신사가 건립되었다. 지금도 그 노기 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끔 들른다.

 

프랑스파에 밀려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가쓰라 다로와 같은 일본군 내 독일파가 권력을 잡은 것은 1878년 독일식 참모본부가 일본군에도 설치되면서부터다. 세이난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지도부는 병력은 물론 병기도 훨씬 우수했던 정부군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군에 고전한 이유를 분석했다. 결론은 비효율적인 전시명령체계였다. 야마가타는 군사작전과 관련된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여 정부 조직과는 분리된 별도의 참모본부를 설립한다.

 

육군성에서 독립한 참모본부는 천황의 직속 기구이지만, 천황이 실제로 전시작전을 지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의회나 정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참모본부의 법적, 정치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정치와 군사의 분리’를 뜻하는 참모본부의 독립은 ‘통수권(統帥權)’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수권은 군령권(軍令權)이라고도 한다. 죽을 때까지 야마가타와 경쟁 관계였던 같은 조슈번 출신의 당시 내무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가타의 이 같은 제안에 적극 천성했다. 군대가 스스로 알아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기초하여 1889년에 발포된 메이지헌법의 제11조에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天皇は、陸海軍を統帥する)’는 문구가 들어간다. 일본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였다.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는 이 문장의 실질적 의미는 참모총장이 군대의 통수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초대 참모총장은 물론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천황의 참모본부’가 실제로는 ‘야마가타의 참모본부’가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제국의 참모본부 역시 정부나 의회로부터 독립된 기구였다. 야마가타는 독일군 참모제도의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여 그대로 흉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참모본부의 독립은 이후 걷잡을 수 없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군국주의’의 출현이다. 군국주의는 국가를 완전히 군대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군대가 의회나 정부보다 더 높은 권력을 갖는 국가를 가리켜 군국주의라고 한다. 일본과 독일은 군국주의와 아주 잘 어울리는 나라가 된 것이다.

 

미국이나 과거 소련, 러시아, 중국 또한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지만, 군국주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군대가 의회와 정부의 지배를 받는 까닭이다. 이들 나라에서 군대의 각급 지휘관은 최고통수권자의 위임을 받아 군대를 지휘한다. 독일 제국이나 일본이 군국주의로 몰락했던 이유는 바로 의회와 정부로부터 독립한 참모본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육군의 참모본부가 독립하자 해군 참모본부도 독립하여 천황의 직속기관이 된다. 이제 군대의 행동을 통합 조정할 기관마저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의 반목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렇게 육군 참모본부가 완전히 독립적인 기구가 되고, 병력의 규모와 예산이 늘어나자 야마가타는 1882년 11월 ‘육군대학교’를 설립한다. 군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있는 지휘관의 전문적 양성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물론 이미 설립한 육군사관학교가 있었지만 출발 자체가 프랑스 군제에 따른 교육 과정이었다. 야마가타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이미 장교로 임관된 이들을 대상으로 재교육하는 독일식의 육군대학을 설립했던 것이다.

 

1884년 당시 육군경이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1842~1916)를 대표로 하는 시찰단이 유럽을 순회했다. 이 시찰단에는 앞서 설명한 가쓰라 다로를 비롯,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와 같은 당시 일본 육군의 핵심 장교가 포함되었다. 후에 가와카미와 카쓰라는 일본 육군 개혁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되고 일본의 침략전쟁의 주역이 된다. 미우라는 조선의 일본공사가 되어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다.

 

오야마 일행은 유럽 국가의 군사 전반에 관한 자료를 조사한다. 그러나 시찰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독일로부터 새로 설립한 육군대학에 적합한 교관을 초빙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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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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