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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삶
최지인,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시인이 직시한 세계를 마주보게 된다면 당신도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의 두 발이 닿은 삶터가 지금 어떤 진동으로 위태로운지를. (2018. 01. 04.)
언스플래쉬
아직 내 삶이 아니다. 미성년의 시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몇 개 되지 않으니까, 내 삶은 스무 살 이후부터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스무 살 이후에도 여전히 백치여서 내 삶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때가 되면 적당한 규격을 갖추고 나서 나의 삶이 시작될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스물다섯에 처음 다니게 된 회사에서는 말꼬리를 흐리는 버릇 때문에 자주 혼났다. 말끝이 분명하지 않아서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괜찮았다. 아직 사회의 언어를 떼지 못했으니까. 옹알이 중인 셈이니까.
월급이 백오십 넘으면 그때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일들이 많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경험이니 공부니 듣기만 해도 진력나는 해외여행에는 관심도 없었다. 다만 운전면허증을 따고 적금통장과 취미를 만들고 한두 군데쯤 정기후원을 하고 싶었다. 본격적인 삶이란 그런 꼴을 갖췄을 것 같았다. 나와 내 몫의 사회를 스스로 책임지며 꾸려가는 조그만 살림. 살림의 규모와 비례하는 건강한 피로와 책임감. 그러나 나는 나 하나를 책임질 자신이 없고, 살림이라곤 빚 혹은 빚진 마음이 전부인 것에 비해 매일 피곤에 얻어터진 몸을 잠자코 재우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내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임신 중인 회사언니가 출근길에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 서서 잔다고 했다. 그게 돼요? 놀라서 묻던 내가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 서서 잠을 자는 게, 그게 된다는 걸 머지않아 알았다. 언니는 유산기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퇴사했지만 메스꺼움과 졸음을 견디면서도 지키려 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슬펐다.
나에겐 몇 해가 지나도 운전면허증과 적금통장과 취미가 생기지 않았고, 정기후원 같은 것은 잊어버렸지만 괜찮았다. 내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별 계획도 없이 어영부영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읽지 못한 책들이 마음의 짐을 대신 얹고 있을 뿐이다. 엎드릴 자리도 없이 빼곡한 책상을 본다. 꼭 읽어야 할 책들을 읽고 나서는 나의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끈질긴 기분을 성가셔하면서. 원고를 마감하고 나면 본격적인 주말이 시작될 거라고 터무니없이 위안하면서. 본격적인 마음가짐도 없이 오래 덧붙이기만 한 생활은 난감하고, 태어난 적도 없이 장시간 떠돌아다닌 늙은 영혼은 어색하다. 나는 생활을 곁눈질하는 편이 더 익숙했기 때문에.
미래 같은 건 필요 없다
이것은 미래가 아니다
덧붙임이라고 해 두자
사람 죽으면 그 영혼이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검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 부분
<빌려온 시>는 시 한두 편을 빌려와 내 이야기를 해보자는 애당초 뻔뻔한 기획이었지만, 부끄러워서 그렇게 못했다.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시인의 태도 때문이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는 삶이 어떤 지경으로 볼품없든 불우하든, 문학적 수사와 상징의 세계로 달아나지 않으려는 직시의 에너지가 담긴 시집이다. 총 4부로 나누어진 구성의 1부는 “어떤 일이든 가능한 것처럼”이라는 소제목으로 출발하며, 마지막 4부의 소제목은 “일상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시집과 동떨어진 감상적 사족을 주절거린 것이 아니리라 믿는다. 시인이 직시한 세계를 마주보게 된다면 당신도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의 두 발이 닿은 삶터가 지금 어떤 진동으로 위태로운지를. 영혼의 마지막 은신처인 꿈, 그곳으로 몸을 굴려보려 해도 금세 벽에 부딪히고 마는 실감의 단칸방을. 그래서 벽에 달라붙어 잠드는 자의 본격적인 삶을.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이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 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비정규」 전문
나는 벽에 붙어 잤다최지인 저 | 민음사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외줄타기에서 개인과 시대성이라는 두 개의 추로 중심을 잡는다. 젊은 시인의 정제된 언어는 삶과 죽음, 개인과 시대를 오가며 담담한 슬픔과 애틋한 기쁨을 표현해 낸다.
관련태그: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최지인 작가, 마음의 짐, 단칸방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
<최지인> 저9,000원(10% + 5%)
먼먼 과거와 먼먼 미래 사이에서 현재를 비집고 나오는 선한 사람들의 목소리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최지인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가 ‘민음의 시’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죽음과 삶 사이에 언어라는 줄을 걸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균형을 보여 주던 최지인은 이번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