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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합시다, 사랑이 탄생하도록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손의 모양을 생각해본다. 문을 열어줄 때.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문고리를 놓지 않을 때. 눈물을 닦아줄 때. (2017.10.10)
언스플래쉬
고독은 호주머니 속에서만 매만지는 칼과 같다. 사람이 칼을 손처럼 쓰기 시작한 역사는 길다. 호주머니 속의 손을 꺼내어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을 짜본다. 이불을 정수리까지 끌어 덮을 수 있다. 표정을 묻을 수 있다. 가파른 눈물을 받쳐 단 한 방울도 구르지 않게 할 수 있다. 가끔은 머리카락이나 가슴을 쥐어뜯을 수 있다. 자신의 코를 으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왼손이라면 오른손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질 수 있다. 당신 혼자이고, 고독한 단독무대가 만족스럽다면 얼마든지, 허공에 양손을 매달고 죽음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그 다음은……
나의 두 손을 맞대는데
어떻게 네가 와서 우는가
―「4월의 기도」전문
고독한 손을 벗어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다음 손의 행동지침을, 시집 속에서 찾아보았다. 가장 먼저 호주머니 속에서 나와야겠지. 손잡이를 돌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다른 이의 손을 감싼다. 손과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을 써서 사랑한다. 왼손과 오른손을 마주한다. 손과 손 사이에 아무것도 틈입하지 못하도록 손과 손을 꼭 붙인다. 기도한다. 네가 와서 운다면 그 눈물이 흐를 수 있도록 길을 연다. 관을 떠메고 갈 손이 필요하다면 내 손을 다 준다. 손과 손이, 또 다른 손과 손을 붙잡고, 끝없는 손으로 연결된다. 긴 행렬. 긴 인사.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악수해야지. 손과 손의 사이에서, 사랑이 탄생하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럽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의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사람은 탄생하라」부분
손의 모양을 생각해본다. 문을 열어줄 때.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문고리를 놓지 않을 때. 눈물을 닦아줄 때. 등을 쓸어줄 때. 광대뼈에 내려앉은 조그만 속눈썹을 떼어줄 때.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가슴 앞에 모을 때. 귀를 잃어버린 목소리를 옮겨 적기 위해 펜을 쥘 때. 뾰족한 슬픔이 꾹꾹 누르고 간 점자들 더듬어갈 때. 나의 손이 다른 손을 쥘 때. 그런 진실한 손의 모양을.
사랑은 탄생하라이원 저 | 문학과지성사
삶에 내재한 죽음과 고독의 심연을 외면 없이 직시하되, 미완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아이들의 천진함에 기대어 현실의 조건과 물질적 속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유연한 상상과 자립적 이미지를 그려내 보인다.
관련태그: 사랑은 탄생하라, 시인 이원, 4월의 기도, 손의 모양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
<이원> 저8,100원(10% + 1%)
천진함의 힘으로 이 슬픔의 경계에서 더 멀리 가보기 시인 이원은 199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그만의 유니크한 언어와 이미지로 현대 문명의 비인간화된 풍경, 그곳에서 낡아가는 삶과 실존적 방식을 날카롭게 해부하며 한국 현대시의 전위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전자 사막’이라는 적실한 표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