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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다락방

『메리 포핀스』, 『빨강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오즈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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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을 번역했다. 다락방을 구르며 책을 읽던 열한 살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한 일이었다. (2018. 01. 02.)

김서령의 우주 서재.jpg

         언스플래쉬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엄마가 막내를 낳던 그 날이라고 하겠다. 엄마는 막내를 낳은 직후 하혈이 멈추지 않았고 아빠는 맡겨둘 곳 마땅찮았던 어린 나를 데리고 엄마의 병실로 갔다. 창백한 엄마가 누워 있던 병실 창가 아래에 앉아 나는 아빠가 사준 카스테라를 먹었다. 플라스틱 조그마한 칼이 들어있던 빵이었다. 물론 엄마는 내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다.

 

“야, 이 가시나야. 막내 낳을 때 니가 세 돌도 안 됐다. 근데 니가 그걸 어째 기억을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말이 안 될 이야기가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그날 오후 서편의 창으로 새어들던 붉은 햇빛도 선명한 걸. 정말이다.

 

그 이후의 어린 날은 깜깜하다. 곧바로 이어지는 기억은 다락방이다. 말이 없고 소심했던 나에게 친구란 고작 별처럼 피었던 마당의 채송화와 옥상 장독대 뒤에 숨겨두었던 맨질맨질한 돌멩이와 낡은 동화책, 그리고 몽당 크레파스 따위들이었다. 다락방에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던 건 순전히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는 내가 제 책을 함부로 만지는 것을 싫어해서 다락방 커다란 은색 궤짝 속에다 숨겨두곤 했는데, 언니가 학교에 가고 난 다음이면 나는 슬그머니 다락방으로 올라가 궤짝을 열었다.

 

조그만 들창으로 봄바람이 들어왔고 나는 졸다말다 하며 하루 종일 다락방에서 놀았다. 그 즈음 엄마도 내가 사라지면 그저 다락방에 있겠거니 하고 말았다. 가장 아껴아껴 읽었던 건 언니가 학교에서 받아온 3학년 새 교과서였다. 새 책을 구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표 나지 않게 책을 아주 조금만 펼쳐서 읽었다. 국어책 속 동화 ‘다섯 개의 완두콩’은, 정말이다, 삽화도 기억이 난다. 분홍색 잠옷을 입은 아픈 소녀가 창가에 서서 마당을 구르는 완두콩을 바라보는 장면.

 

나는 그렇게 다락방에서 자랐다. 여덟 살 때 이사를 한 집에도 다행히 다락방이 있었다. 말썽을 부린 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엄마가 다락방에 가둬버릴 땐 그렇게도 무서운 곳이지만 내 발로 기어 올라갈 때엔 어쩜 그리 보물섬 같았을까.

 

종종 엄마의 옛 졸업앨범이나 아빠의 연애편지 같은 것을 발견한 날도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숱한 책을 읽었다. 『메리 포핀스』『빨강 머리 앤』『키다리 아저씨』『오즈의 마법사』도 다 거기서 읽은 책들이다.

 

3년 전 나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을 번역했다. 다락방을 구르며 책을 읽던 열한 살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한 일이었다. 철자 끝에 e를 붙인 앤(Anne)으로 불러달라던 열한 살의 주근깨 소녀의 수다를 번역하며 나는 내 열한 살을 끝없이 불러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난 12월,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앤 셜리의 이야기 『에이번리의 앤』을 번역해 출간했다. 이 칼럼의 제목이기도 한 우주, 이제 두 살을 갓 넘긴 내 딸을 위한 번역이었다. 네가 자라 열한 살이 되면 엄마가 번역한 『빨강 머리 앤』을, 열일곱 살이 되면 엄마가 번역한 『에이번리의 앤』을 읽어줘. 그런 마음이었다.

 

소설가 윤이형은 동풍을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를 번역했다. 소설가 한유주는 『키다리 아저씨』를 번역했고 소설가 함정임은 『페로 동화집』을 번역했다. 다 어린 시절, 내가 그 다락방에서 읽었던 책들이다. 이미 다 읽은 책이라고? 아니, 그럴 리 없다. 이제 그 책들에는 유년의 기억이 묻어 있다. 동화 속 주인공은 당신 유년의 기억까지 온 얼굴에 묻힌 다음 당신을 빤히 바라볼 것이다. 전혀 새로운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당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붙잡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빨강 머리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 김서령 저 | 허밍버드
나의 열한 살 시절이 지금의 나에게 가만히 다가와 뺨을 부벼 주는 기분이다. 이 작업으로 인해 나는 충분히 위로받았다. 어느 시절 앤이었을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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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 에이번리의 앤 <루시 M. 몽고메리> 저/<정지현> 역/<김지혁>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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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강 머리 앤 <루시 M. 몽고메리> 저/<김서령>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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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즈의 마법사 <L. 프랭크 바움> 글/<W. W. 덴슬로우> 그림/<김석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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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다리 아저씨 <진웹스터> 저/<한유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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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리 포핀스 <P. L. 트래버스> 저/<메리 셰퍼드> 그림/<윤이형>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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