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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과 투명인간

사실 이와 같은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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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자기중심적인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다. 먹자골목 불청객도 아무래도 나보다 못한 사람 같지 않다. (2017.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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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집 근처 먹자골목이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더 시끄럽다. 아무리 불경기라지만, 바야흐로 연말이고 망년회 시즌이니까. 가뜩이나 귀가를 곧잘 미루던 직장인들에게 이만한 핑계거리도 없다. 먹자골목 사장님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런데 이 흥겨운 자리를 방해하는 불청객이 있다. 불청객은 대개 고령의 여성인데 껌도 팔고, 초콜릿도 팔고, 찹쌀떡도 팔고, 비누도 팔고, 때수건도 팔고, 수세미도 팔고, 복조리도 팔고, 시들기 일보 직전의 장미꽃도 판다. 카드 결제는 안 되고, 오로지 현금으로만 거래가 가능하며 현금영수증 따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시중 판매가보다 비싸고, 당연히 그 잡동사니들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 말도 없이 손사래를 치며 불청객을 물리치는 건 그나마 다정한 편이다. 대부분은 불청객이 눈앞에 있어도 투명인간 취급한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처럼 먹자골목에서 술자리를 갖고 있으면 예의 그 불청객을 피할 도리가 없다. 한두 명도 아니고, 불청객의 등장으로 매번 대화가 끊기기 일쑤다. 나한테는 일절 필요 없는 잡동사니들인데 귀찮아 죽겠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할 만한 깜냥은 안돼서 대충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돌려보내곤 한다. 마침 지갑에 현금이 있으면 하나씩 살 때도 있다. 껌은 입가심으로 나쁘지 않고, 초콜릿이나 찹쌀떡은 술안주로 나쁘지 않고, 비누나 때수건이나 수세미도 언젠가 쓸모가 있을 테고, 복조리 하나쯤 있으면 정말 복이 찾아올 지도 모르고, 비록 시들기 일보 직전의 장미꽃이지만 마누라한테 점수도 딸 수 있다. 일절 필요 없는 잡동사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아주 필요 없는 잡동사니들은 아닌 셈이다. 말하자면 필요해서 샀을 뿐이고, 나는 그만큼 자기중심적이다.

 

며칠 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저소득층 아동을 후원하던 한 후원자가 후원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그 후원자는 자신이 후원하던 아동에게 “요즘 유행하는 롱패딩”을 선물하려고 했는데, 후원 아동이 특정 브랜드의 롱패딩을 요구하자 후원을 중단했다. 후원 아동이 요구한 특정 브랜드의 롱패딩이 생각보다 비쌌던 모양이다. 후원자는 후원 아동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 커뮤니티에서 후원 아동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후원 아동이 후원 기간 동안 자신과 만나주지 않았고, 또 후원 아동이 피아노를 배운다며 후원 아동의 정체와 형편을 의심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후원 아동이 “부친의 질환과 모친의 근로 능력 상실로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받게 된 가정의 아동”이라고 해명했고, 피아노 교습도 “정부의 지원”이었다고 해명했다. 또 후원자를 만날 수 없었던 사정에 관해서도 소상히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특정 브랜드의 롱패딩을 갖고 싶어 했던 후원 아동을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후원자의 선의를 고스란히 반영하지 못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문제 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를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를 후원 아동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다.

 

사실 이와 같은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데자뷔처럼 비슷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빅이슈>*를 판매하던 노숙자가 입고 있던 고가의 패딩을 문제 삼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피자헛 피자를 시켜 먹는다며 아이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문제 삼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후원하던 고아원 신발장에서 나이키 운동화를 발견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모두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커뮤니티 또는 소셜미디어가 부풀린 허구일 수 있지만, 소외계층을 대하는 이중적 시선은 분명 실재한다.

 

그 이중적 시선이 일면 이해도 간다. 불쌍한 줄 알고 후원했는데, 후원 대상보다 내가 더 불쌍하면 배신감을 느낄 만하다. 사람들의 선의를 악용한 후원금 사기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는 생계를 후원금에 의존했던 후원 대상이 악랄한 범죄사건의 피의자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불신이 팽배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선의에는 조건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조건이 따라붙은 선의를 함부로 깎아내릴 일이 아니라 선의를 기만하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특정 브랜드의 롱패딩이 갖고 싶었던 아동과 그 아동의 신변을 보호하려 했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후원자의 선의를 기만했던 걸까. 또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피자헛 피자를 먹고 싶어 하면 사람들을 기만하는 걸까. 이참에 후원 대상에게는 일종의 매뉴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제넘은 욕망’은 후원자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으니 주의하시오.” 같은 매뉴얼 말이다.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다. 먹자골목 불청객도 아무래도 나보다 못한 사람 같지 않다. 폭리를 취하는 만큼 왠지 침대 밑에 오만 원 권 지폐를 수북이 쌓아놓고 잠들 것 같다. 불청객의 아들과 딸은 아파트를 몇 채씩 갖고 있고, 대대손손 사는 데 어려움이 조금도 없을 것 같다. 단지 노년에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어서 어떤 날은 껌도 팔고, 또 어떤 날은 초콜릿도 팔고, 또 어떤 날은 찹쌀떡도 팔고, 또 어떤 날은 비누도 팔고, 또 어떤 날은 때수건도 팔고, 또 어떤 날은 수세미도 팔고, 또 어떤 날은 복조리도 팔고, 또 어떤 날은 시들기 일보 직전의 장미꽃도 파는 게 아닐까. 참 양심도 없지. 착한 내가 속아주고 만다. 그렇게 나는 종종 착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런데 만일 그게 아니라면? 불청객도 나만큼 힘들다면? 앞서 얘기한 후원자도 나만큼 힘들고, 후원 아동도 나만큼 힘들고, 그 후원 아동을 후원하는 후원 단체도 나만큼 힘들다면? 형편은 다르지만 저마다 모두 힘들다면? 우리의 가난과 불행이 근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얽히고설킨 거미줄 위에 서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면? 서로 기대지 않으면 누구든 속절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누구든 투명인간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 거미줄을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거미줄이고 나발이고 이런 얘기는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얘기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시들어 버린 장미꽃보다 쓸모가 없다. 생각 끝에 공연히 화가 났고, 홧김에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정기후원을 하고 말았다. 본인인증부터 결제까지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문득 후원 아동에게 롱패딩을 사주려다 만 후원자가 고마웠다. 덕분에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나는 또 착하다는 착각에 마음껏 빠질 수 있으니까. 선의 따위 알게 뭔가. 얼마 되지 않는 후원금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나는 그만큼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들 새해 복이나 많이 받아라, 제발.

 

*1991년 영국에서 창간된 대중문화잡지이며, 홈리스의 자활을 돕고 있다. 2010년 7월부터는 한국판 <빅이슈>가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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