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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화된 보조 양육자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나의 일부, 나의 한 조각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이 절대적인 타자의 의미에 대해 잘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한 개인의 발달을 설명하는 정신분석학 역시 대타자라는 표현을 써서 나를 만들어내게 하는, 이 절대적 타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2017.11.28.)
언스플래쉬
1.
‘일하는 엄마’에 관해 최근에 두 가지 정도 생각해볼 만한 이슈가 있었다. 하나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육아 도우미 제도에 관한 국민 청원’ 제안이다. 11월 6일에 처음 온라인상에 올라와 20여 일이 지난 지금 2,000명 정도가 참여한 이 청원 제안문에서 제안자는 1 육아 도우미 급여를 제한할 것, 2 육아 도우미들의 범죄 이력을 국가가 관리하고 (육아 도우미들이 대체로 외국인이라는 가정하에)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추방 및 재입국 금지할 것, 3 소개소의 중개료를 제한할 것 등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위 글에서 특히 두 가지 태도가 놀라웠는데 우선 급여 제한, 범죄 기록의 공개 등 부모의 가장 큰 조력자인 육아도우미들에 대해 반인권적, 반헌법적인 조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취해달라고 하는 일견 모순적이면서 급진적인 태도였고, 다른 하나는 육아도우미들을 거의 대체로 이방인으로 가정하는 태도였다.
이 두 가지는 사실 연결된 태도일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를 타자화할 때 그에 대한 인간적인 권리나 헌법상의 권리에 대해 더 쉽게 눈감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맡기는 대상을 이렇게 타자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괴하고 두렵기도 하다. 요즈음의 부모들이 이전의 부모들보다 특별히 더 배타적이고 반인권적이어서 이런 사고방식이나 불안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육아도우미 중에는 중국 교포라고 불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일까? 일정 부분 사실이지만 이런 ‘인종주의’의 확산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이 청원 제안 글에서도 그렇지만 대체로 ‘시터’라고 불리는 이들에 대한 불만글을 보면 국적이나 민족이나 인종이라는 구분이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국적이나 민족이나 인종이라는 범주는 오히려 실제보다 대단히 과장되어 적용된다. 육아 도우미 = 이민족 = 이방인이라는 넓은 관념 같은 것이 생겼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래서 이런 현상에서 내가 더 관심을 갖는 부분은, 요즈음의 부모들이 갖게 된, 역사적으로 특수한 종류의 불안이다. 아이를 맡기기는 맡겨야 하는데 맡겨야 할 대상이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이질감, 존자 자체부터 믿을 수 없는 존재일 때의 공포 같은 것. 이 독특한 시대정신, 감정구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육아 도우미에 대한 불만이나 불평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보조 양육자들과 함께 했던 초기 양육기 2~3년 동안 수없이 많은 불만과 불평을 쏟아낸 바 있다.(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감사도 쏟아냈지만) 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늘 겪는, 혹은 중요한 일을 함께해야 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늘 겪는 아주 보편적이고도 익숙한 갈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절대적인 불신과 공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더 잘 보여주는 것 같다.
2.
최근에 화제를 모았던 또다른 기사가 있다. 특히 일하는 엄마들에게 희소식이라며 SNS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이 기사는 속칭 ‘3세 신화’를 반박하는 연구를 소개하는 NHK발 기사였다. 스가하라 마스미 오차노미즈여대 교수가 일본인 모자 269쌍에 대해 12년간의 추적연구 끝에 영국 정신의학자 존 볼비가 1950년대에 주장한 ‘애착 이론’을 반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는 내용이었다. 엄마의 취업과 아이의 문제행동에 아무런 연관성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세까지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좋다.’라는 ‘3세 신화’가 일하는 엄마들에게 불안과 죄책감을 심어온 면이 있다. 심지어 근거도 미약한 이야기였다면 더더욱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잘못 이해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서 ‘자기’에 대한 개념을 획득하기까지 중요한 ‘타자’가 꼭 생물학적인 엄마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자기’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려면 절대적인 한 명의 타자와 마주해야 한다. 물론 그 타자는 엄마에서 아빠로, 조부모로, 육아 도우미로 바뀔 수 있지만 그 관계가 일대일 관계여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이 절대적인 타자의 의미에 대해 잘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한 개인의 발달을 설명하는 정신분석학 역시 대타자라는 표현을 써서 나를 만들어내게 하는, 이 절대적 타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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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 상호작용은 초기 양육기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그 누구도 이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고 건너뛰어서도 안 된다. ‘3세 신화’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이 초기 양육기의 ‘일대일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방식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누구나 섬세한 돌봄과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거의 기억을 못 하겠지만, 우리 자신도 대체로는 이런 섬세한 돌봄을 받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거의 늘 아이의 주변에 있으면서 필요할 때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품, 그리고 따뜻하게 반응하는 시선과 목소리는 초기 3년, 아니 그 이상까지도 매우 의미있고 가치있다. 생물학적인 엄마이건, 아빠이건, 다른 전문 양육자건 누군가의 그런 보살핌 없이 사람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로 여겨진다.
3.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3,4명의 육아 도우미를 거쳤고, 아이가 기관에 잘 적응하면서 지금은 거의 육아도우미의 도움 없이 공적이고 사적인 기관과 협업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초기 양육기에는 낳아놓기만 하고 직접 돌보지 못한다면 그게 부모인가, 이런 일에 전문적인 인력의 도움을 받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의심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보조(전문)양육자들이 없었다면 아예 양육 그 자체가 불가능했겠구나 하는 현실적인 감각이 생겼다. 이들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아이 돌봐주던 이런 보조(전문)양육자들과 헤어질 때마다 무척 슬펐다. 살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또 근본적인 슬픔이 상기되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렇게 상기되는 것이 무척 많다. 특히 나를 돌봐주던 사람들, 아직 내가 나임을 깨닫기 전에 나와 섞여 있던 사람들, 누가 나인지 타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 모호함 속에서 서서히 나를 발견해가는 시기에 나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던 그 손길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재발견하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기억이다. 그 손길들은 우리 마음과 기억의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 내면을 형성한다.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나의 일부, 나의 한 조각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사실 만남과 헤어짐을 충분히 연습한 어른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에게는 더 특별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를 돌보는 일 역시 자기의 한 조각을 내어주는 일과 같다. 그 흔적은 아이에게 영원히 남는다. 아이들은 그런 조각조각들을 의식과 (특히) 무의식에 쌓으며 그것들을 밟고 올라 어른이 된다. 나 역시 그런 조각들과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와 너마르틴 부버 저 | 문예출판사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나와 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만든 관계를 본질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가르침을 던져준다.
관련태그: 나와 너, 마르틴 부버, 절대적 타자의 중요성, 육아도우미 제도
6세 여아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문서를 만드는 편집자이다.
<마르틴 부버> 저/<표재명> 역9,000원(10% + 5%)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세계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 관계 중의 하나의 관계 속에 놓인다고 보았다..'나와 너'라는 관계와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 현대인이 직면한 인간소외와 원자화의 심각한 위기에 맞서,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나와 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만든 관계를 본질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가르침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