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지혜의 사적인서점
완벽한 선택
이름 짓는 방법을 알려 주는 수업을 들었다
지혜 씨, 어차피 책을 처방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면 서점 안 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거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면 뭘 해도 실패해. 하고 싶었던 걸 해 봐야 실패하더라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2017.11.24)
서점을 준비하면서 가장 오래 고민했던 두 가지가 이름과 가구였다. 서점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가구가 주는 힘이 참 좋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으쓱한다.
지인 1: ‘사락사락’ 어때? 책장을 넘기는 소리. 한자로 글 사詞, 즐길 락樂을 쓰면 책을 즐긴다는 뜻도 되잖아.
나: 흠, 나쁘진 않은데 임팩트가 부족한 것 같아.
지인 2: 상수리나무 밑에선 상수리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어른 나무에서 떨어지면 되도록 멀리까지 굴러가라고 도토리가 동그랗게 생긴 거래요. 사람들에게 책의 재미를 널리 퍼뜨린다는 의미에서 ‘도토리문고’ 어때요? 지혜 씨 별명이 다람쥐기도 하잖아요.
나: 남산도서관에 이미 ‘도토리문고’가 있어요. ‘도토리책방’이라는 서점도 있고요.
지인 3: ‘귀책사유’는 어때요? 당신의 책을 생각한다. 서점 콘셉트에 딱 들어맞는 것 같은데….
나: 의미도 마음에 들고 발상도 참신해서 좋은데, ‘귀책사유’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느낌이 있어서….
오픈 예정일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마음에 쏙 드는 서점 이름을 짓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에 없던 방식의 서점을 운영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콘셉트가 드러나는 이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긴 좋겠지만 그랬다가 손님이 없으면? 잘 안 되면 일반 서점으로 운영하게 될 수도 있으니 서점 콘셉트가 드러나는 이름은 피해야겠지? 이런 고민은 서점에 넣을 가구를 고를 때도 나를 괴롭혔다. 손님과 일대일로 소통하는 서점 특색에 맞는 맞춤 가구를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소규모 공방 ‘아이네 클라이네 퍼니처’ 목수님을 만나 상담을 했다. 이상록 목수님에게 서점 콘셉트와 필요한 가구를 설명한 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중에 일반 서점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으니 다용도로 활용 가능한 디자인이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아 결국 무인양품에서도 가구 상담을 받았다. 서점을 접게 되더라도 집에 가져다 놓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랬다. 나는 서점이 망할까 봐, 회사 밖에서 펼치는 나의 첫 도전이 실패로 끌날까 봐 너무 두려웠다. 이런 마음으로는 서점 이름도 가구도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지혜 씨, 어차피 책을 처방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면 서점 안 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거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면 뭘 해도 실패해. 하고 싶었던 걸 해 봐야 실패하더라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땡스북스 이기섭 대표님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가 되돌아온 질문에 정신이 들었다.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서점을 열기로 결심했는데 실패가 두려워 본질을 잊고 있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내가 서점 창업에 실패해서 잃는 게 뭐지? 위험 요소를 계산해 보았다. 창업 비용 몇백만 원이 다였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을 망칠 만큼 큰 돈도 아니었다. 책임져야 할 부양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 서점이 잘 안 되면 다시 회사에 취업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다시 이름 짓는 일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름 짓는 방법을 알려 주는 정신 님의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책을 꺼낸 다음, 책에 나오는 단어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들을 쭉 적고, 그렇게 찾은 단어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보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집으로 돌아와 책꽂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나의 사적인 도시』라는 제목에 시선이 멈췄다. 예전에 홈페이지 이름을 『아주 사적인 시간』이라는 일본 소설 제목으로 달아 두었던 것도 생각났다. 사적인. 개인을 뜻하는 ‘personal’과 비공개라는 뜻의 ‘private’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으니 한 사람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점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싶었다. 서점보다는 책방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지만, ‘사적인책방’보다는 ‘사적인서점’이 비슷한 초성이 반복되어 안정감이 들었다. 사적인서점. 마음에 꼭 드는 이름이었다.
가구 제작에도 박차를 가했다. 서점의 특색과 공간 등을 고려해 목수님이 제안해 준 디자인은 완벽했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가로로 긴 파티션이 보인다. 책과 소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파티션은 서점의 쇼윈도 역할도 한다. ‘이번 달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까?’ 목수님은 서점이 이런 궁금증을 일으키는 공간이었으면 해서 파티션을 떠올렸다고 하셨다. 파티션 너머에는 일체형으로 제작한 상담 탁자가 있다. 파티션과 벽 사이의 탁자에 앉으면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일대일 대화를 위한 창구窓口를 떠올리며 구상한 탁자라고 하셨다. 벽면에 설치한 서가는 다양한 크기의 책뿐 아니라 소품을 진열할 수 있도록 했다. 서가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한 권 한 권의 책이 돋보이도록 진열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적용된 형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가구를 아이네 클라이네에 의뢰하고 싶었지만 예산 문제로 서점의 특색을 드러내는 메인 가구 두 가지만 제작하기로 했다. 파티션과 일체형 상담 탁자, 그리고 책장이 서점에 들어오자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꿈꾸는 목표나 대상에 대해 직접 경험해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욕망한다. 진짜 형사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텔레비전의 형사물을 보며 형사를 꿈꾸고,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도 않고서 로맨틱한 사랑을 갈망하며,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결혼을 한다. 그것은 마치 운전면허는커녕 단 한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근본 조건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지 모른다. - 『선택, 선택의 재발견』 23쪽
생각해 보면 나는 편집자라는 직업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편집자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서점원이 어떤 일을 하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서점원으로 전업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에 없던 방식의 서점을 운영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공이 보장된 완벽한 선택은 없다.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실패를 하지 않고 사는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미리 걱정하고 몸을 사리기보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을 하자.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든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선택, 선택의 재발견김운하 저 | 은행나무
『선택, 선택의 재발견』은 점심시간에도 메뉴 앞에 선택하고 망설이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에게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 앞에서 조금은 편안해지는 법을 제시한다.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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