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승한의 얼굴을 보라
문소리의 정색: 한국 사회의 리트머스지
여자도 정색할 수 있다는 사실
세상이 그를 ‘진지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 배우는 종종 “언제나 웃어줘야 하는 사람”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2017.10.16)
열 명의 감독이 각자 12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JTBC의 새 예능 <전체관람가>의 한 장면, 편당 제작비의 최대 액수가 3000만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감독들은 웅성인다. 이명세 감독은 프로덕션 일정을 감안하면 결코 넉넉한 예산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봉만대 감독은 배우들에게 개런티를 많이 줄 수 없다고 사정을 해야 하는 액수라는 점을 호소한다. 정색을 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프로그램의 MC 문소리다. “우선 ‘돈이 3000만원이다’부터 시작한 거니까, 이 3000만원에 맞게 아이템과 시나리오를 쓰셔서 너무 사정하지 않는 영화를 만드셔야 되는 거예요.” 단호한 어조로 주어진 예산 안에 영화를 맞춰야 하는 프로젝트임을 설명하는 문소리의 말에 감독들은 납득한다. 공동 MC 윤종신은 “저희 프로덕션에서 제일 까다로우신 임원진”이라고 우스개로 부연했지만, 수많은 영화 현장을 경험하고 연출 경력까지 쌓은 문소리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말을 해보면 진지한 면도 있는데 생각보다 웃기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문소리는 세상이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바가 있으면 말해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홍보용 인터뷰를 하면서도 문소리는 한껏 출연배우를 칭찬해 놓고는 감사해 하는 배우에게 “이게 다 홍보하자고 하는 건데 뭐”라는 식으로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아마 세상이 그를 ‘진지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 배우는 종종 “언제나 웃어줘야 하는 사람”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자기 주장이 있고 때로 그를 관철하기 위해 정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대가 세다’ 같은 말들로 공격 당하거나 ‘걸 크러쉬’라는 수식어로 포장이 되곤 한다. 그런 세상 속에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고자 하는 말을 또박또박 발음하는 문소리는 오랜 세월 오해의 대상이 됐다. “소리야, 너는 충분히 예쁜데 다른 여배우들이 지나치게 예쁠 뿐이야.” 이창동 감독이 했다는 말은 그래서 이렇게 다시 고쳐 읽어도 무방하리라. 그는 충분히 웃기고 상냥한 사람이다. 다른 여자들이 지나치게 상냥하고 지나치게 웃기를 강요당했을 뿐이다.
<박하사탕>을 개봉할 무렵 이창동 감독은 문소리에게 “한국영화계가 환영하며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문소리는 자기가 싸우기는 왜 싸우냐고 답했다. 많은 이들이 <여배우는 오늘도>를 두고 남자 중심의 한국 영화계에 문소리가 던지는 일침이라 해석하지만, 문소리는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지하게 자기 주장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문소리의 정색은 차라리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리트머스지인지도 모른다. “대학 내내 여성운동하는 선배들을 피해다녔다. 하지만 이 사회가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안 될 수가 없었다.” <여배우는 오늘도> GV 현장에서 했던 말처럼, 문소리의 정색이 유별나게 느껴진다면 그건 문소리 본인이 아니라 여자 배우의 정색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경직된 한국 사회 때문일 것이다.
관련태그: 문소리, 여배우, 걸 크러쉬,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