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세상에서 누린 행운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편집 후기
어쨌든 세상은 이렇게나 여전하다. 여전한 세상에서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데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 (2017.09.13)
사실 이 책의 원고를 보면서 많이 힘들었다. 기혼 여성, 여성 게이머, 착실한 ‘개념녀’, 여성 노동자. 저자 네 명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독자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고 확신했다. 내 삶의 장면들이 조각조각, 저자 네 명의 글에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결코 즐거운 장면들이 아니었고, 때로는 두렵거나 피로해서 외면하려 애쓴 상처들이기도 했다. 그런 문장들을 되풀어 읽는 것이 힘들어서 가슴은 좀 떼놓고 머리로 글자만 읽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다.
목숨 값으로 5만 원을 책정 받은 날 이 책이 출간됐다. 그날은 어느 유튜버가 ‘갓건배’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여성 게이머의 과격한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이 타당한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살인 협박을 하며 실제 그 여성 게이머를 찾아 나선 것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한, 그것이 ‘콘텐츠’로 소비된 날이었다. 해당 유튜버는 벌금 5만 원을 선고 받았다.
설렘으로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편집 후기를 남기려던 마음은 순식간에 분노로 돌변했다. 이 책을 만들면서 느꼈던 자매애와 연대의 가능성, 아름다운 인류애(?)에 대한 순진한 희망과 출간의 기쁨으로 무난하게 갈무리하려던 둥글둥글한 마음이 그 사건으로 다시금 날카롭게 벼려졌다. 맞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지. 그래서 그날의 개인적인 편집 후기는 “앞으로 페미니즘 책은 분노로 만들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으로 대신했다. 그냥 묵묵히 만들면 되는 건데, 지금 이렇게 적고 보니 민망하다.
어쨌든 세상은 이렇게나 여전하다. 여전한 세상에서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데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 공저자 중 한 명인 오빛나리는 “나는 나의 고독한 방에서 나가 연약한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당신의 어깨에 올려놓고 싶다. 당신도 내게 그랬으면 좋겠다”고 썼다. 이 책을 읽으며 이토록 여전한 세상일지라도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드는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관련태그: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사적인 이야기, 개념녀, 여성 노동
“그리하여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 바르트의 문장을 곱씹으며 매번 독창적인 관계로서의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
<박소현>,<오빛나리>,<홍혜은>,<이서영> 공저15,120원(10% + 5%)
페미니즘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언어다. IS로 간 김 군이 남긴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는 말은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은 메르스갤러리, 트위터에서의 해시태그 운동(#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내가_메갈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추모 시위 등으로 번지며 지난 2015년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