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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주정뱅이들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하나같이 슬퍼서 아이고, 저 한심한 주정뱅이들! 이라고 욕도 못 한다. (2017.08.02)
출처_ unsplash
여름밤이었다. 맥주나 한 잔 할까 싶었다. 쿡티비로 영화나 한 편 보면서 마셔야지, 하면서 안주거리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자니 남편이 말을 섞는다.
“그때 그 고로쇠술 마셔봐.”
며칠 전 아버님이 챙겨주셨다며 시댁에서 들고 온 술이었다.
“나도 한 잔만 하고. 독한 거야. 많이 마시면 내일 출근 못해.”
페트병에는 ‘지리산 호랑이 고로쇠’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고 채취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도 쓰여 있었다. 고로쇠 수액 100%라는 글씨도 선명했다.
“이거 고로쇠 수액 아니야? 술이란 말 없는데?”
내가 물었지만 남편은 단호했다.
“아냐, 그거 술이야. 아버지네서 한 잔 마셔봤는데 진짜 머리가 막 어지러웠어.”
오랜만에 둘이 앉아 술을 마시게 된 터라 오징어 두 마리를 꺼내 데쳤다. 뜨거운 오징어를 잘게 썰고 초고추장도 종지에 덜고 잔 두 개를 꺼냈다.
“뭐야, 하나도 안 독한데?”
정말 하나도 독하지 않았다. 살짝 동동주 맛이 나는가 싶기도 했지만 밍밍한 술이었다.
“그러네. 아버지네서 마실 땐 독했는데. 그래도 조심해. 언제 죽을지 몰라.”
그래서 조심조심 마셨다. 큰 페트병 반을 비웠다. 딱 한 잔만 마시겠다던 남편도 계속 마셨다. 오징어숙회도 다 집어먹고 배도 부를 대로 불러서 그만 잘까 싶은데 남편이 문득 생각난 사람처럼 말했다.
“이거…… 술 아닌가봐.”
“응?”
“술 아니고 그냥 고로쇠 물인가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술이라고 마시긴 했지만 술기운도 없었고 취하지도 않았고 그저 배만 불렀던 것이다.
“정말 그냥 고로쇠물인 거 아냐? 그걸 술인 줄 알고 이만큼이나 먹은 거야, 우리가?”
술상을 치우다 말고 우리는 한참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버님이 술이라고 해서 술인 줄 알기는 했지만 사실 술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페트병에는 고로쇠수액 100%라고 쓰여 있었고, 그 100% 수액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술을 빚었을 거라고 생각한 건 그냥 우리만의 짐작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술이었건 술이 아니었건 우리가 기가 막혔던 건, 반병을 다 마시고 난 다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게 술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건 너무 바보 같은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이게 술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진짜 모르겠어?”
우리는 서로에게 재차 물었지만 둘 다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말 몰랐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전에는 고로쇠물을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게 술이건 고로쇠물이건 간에, 그게 술인지 고로쇠물인지도 모르고 몇 시간 동안 홀짝홀짝 마셔댄 바보들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게 술인지 고로쇠물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술인 줄 알고 캬아, 좋아, 떠들며 마셔댄 둘 다 진짜 바보 같아서 우리는 반이나 비운 페트병만 한참을 쏘아보았다.
“아냐, 술이긴 한 거 같아. 쫌 핑 돌아.”
“난 안 돌아.”
“설마. 술이겠지.”
“아닌 거 같아. 우리 바보 같아.”
그런 모자란 대화를 하며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지만 숙취도 없었으니 진짜 고로쇠물인 모양이었다.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에는 주정뱅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하나같이 슬퍼서 아이고, 저 한심한 주정뱅이들! 이라고 욕도 못 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주정의 역사와 핑계가 어찌 그리 안쓰럽고 다정한지 나도 슬그머니 그들 사이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소주 한 잔 들이켜고 싶어지는 것이다. 작가 말고, 그 주인공들을 진짜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돼지껍데기도,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빈대떡도 사줄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데.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저 | 창비
이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을 잡아채는 선명하고도 서늘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그려낸다. 인생이 던지는 지독한 농담이 인간을 벼랑 끝까지 밀어뜨릴 때,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권여선> 저13,500원(10% + 5%)
인생이 던지는 잔혹한 농담, 그 비극을 견디는 자들이 그리는 아름다운 생의 무늬 한국문학의 대표작가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예스24 한정 특별판으로 선보인다. 이번 특별판은 화가 임수진의 그림으로 표지를 디자인하여 더욱더 눈길을 끈다. 잔이 만들어낸 그림자와 빛을 그려낸 임수진의 작품은 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