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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펭귄이 왔다

『펭귄 블룸』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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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지만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 최고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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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결코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친구들이 동네 소문이나 영화배우들, 바이런 베이(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주 북쪽에 있는 곳 ― 옮긴이)에 대해 정신없이 수다를 떨 때, 샘은 의학과 그녀가 좋아하는 책과 대학 졸업 후 방문할 계획을 세운 서아프리카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미있고 예쁘다는 점 외에도 샘에겐 뭐라 콕 집어서 말하기 힘든 특별한 면이 있었다. 하이힐을 신고도 간신히 15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샘은 조용하지만 강한 힘을 발산하는 소녀였다. 나는 삶에 대한 그녀의 애정에 늘 힘을 얻었고 그녀의 강한 존재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샘은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 적도 없지만 무언의 자신감이 있어서 샘을 보면 뭐든 마음먹은 건 다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그건 단순한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중략)


샘과 아이들은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모래를 보면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만에서는 그런 곳이 드물었다. 해변에서 돌아선 나는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립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시간은 거의 오전 11시가 됐고 모든 것이 뜨겁고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교 사원을 보고 사진 몇 장을 찍고 점심을 먹은 후에 자전거를 타고 저기를 가던가 아니면 날씨가 좀 서늘해진 오후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다음, 시간이 멈췄다. 나는 종이 부서지는 것처럼 금속이 세게 돌을 치면서 추락하는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샘은 안전펜스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울타리는 콘크리트 기둥에 볼트로 고정한 철제 장대들과 튼튼해 보이는 나무 기둥들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우리는 몰랐지만 그 나무 기둥들 여기저기가 썩어서 가루가 돼 있었다. 그 울타리가 샘 밑에서 허물어지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철제기둥들이 6미터 아래에 있는 시멘트 바닥에 쾅 부딪치면서 파랗게 불꽃이 일었다. 바로 그 소리에 내 귀가 울리면서 나는 홱 돌아봤다.

 

갑자기 기대고 있던 울타리가 무너져서 경악한 샘은 균형을 잃었다. 샘은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그 가장자리에 그대로 서서 허공에 몸을 기울인 채, 가느다란 팔을 허우적거렸고, 손가락들은 마치 허공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길게 뻗었다가 그대로 하늘로 날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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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녀가 땅바닥에 떨어진 소리는 결코 듣지 못했다. 내 귓속에는 무시무시한 침묵만 울리고 있었다. 순간 내 마음이 텅 비면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한 가지 생각만 났다. 나는 들고 있던 주스 잔을 떨어뜨리고 옥상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샘은 6미터 아래 타일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시공이 저절로 접혀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느새 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의식은 없었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것도 간신히.

 
추락하면서 받은 엄청난 충격에 샘이 신고 있던 붉은 슬리퍼가 날아가 버렸고 끼고 있던 선글라스 역시 사라졌다. 샘의 눈은 완전히 감긴 것도 아니어서 흰자 아랫부분이 살짝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했다. 그러다 샘의 등 한가운데에 뼈 같은 것이 끔찍하게 툭 튀어나온 게 보였다. 내 주먹만 한 크기의 혹이 샘의 티셔츠를 밀고 올라와 있었고, 나는 샘이 최악의 상태일까 두려웠다.


샘은 혀를 깨물고 있어서 꽉 문 이빨이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유령처럼 아주 희미하게 헐떡거리며 얕은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나는 샘의 입을 벌려서 피를 뱉어내게 하려고 했지만 샘은 좀처럼 턱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서 뭉쳐 작은 베개처럼 만들고 샘의 얼굴을 부드럽게 옆으로 기울여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두 손을 받쳐서 그녀의 머리를 감싸자마자 곧바로 손이 뜨뜻해지면서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샘의 금발머리 여기저기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샘의 머리는 두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내가 어디에 손을 대건, 그녀의 머리를 어떻게 빗어서 갈라놓건, 아무리 피에 흠뻑 젖은 셔츠를 머리에 꼭 대고 누르건 상관없이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피가 계속 나오는 찢어진 상처 부위들을 찾을 수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숙여서 샘의 천사 같은 얼굴이 점점 더 커지는 진홍색 후광의 한가운데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그녀의 피가 콘크리트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서도 희망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도와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잃은 내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소리치고 다시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누구든 내 아이들을 잡고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이런 상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들 셋 모두 바로 내 옆에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사색이 된 얼굴로. 노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두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략)


샘이 회복되는 기미 없이 몇 주가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더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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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명랑해 보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애쓰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매일매일 샘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했다. 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의미 있는 일에 쏟지 못하게 된 샘은 우리 가족 인생의 가장자리에 앉아 지켜보면서 그저 갈망하기만 했다.


샘은 이제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을 위해 조용히 애도했다. 그녀는 울면서 잠이 들었고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이 집에 와서 그녀를 볼 때면 애써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녀가 내면의 힘을 잃어가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빛을 잃어갔고 전처럼 자주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매일 아침 샘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샘은 더 이상 잠에서 깨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샘은 자신이 망가진 채 방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샘의 눈에서 반짝이던 빛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샘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자신 안에 침잠하고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이 고통에 휩싸인 채 휠체어에 묶여 우리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건 우리로선 참을 수 없이 힘든 일이었다.


나는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지만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 최고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 펭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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