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유럽이냐, 아시아냐?
터키, 이스탄불
그러다 이스탄불 고양이를 만났다. 이건 뭐 세상 다 안다는 표정이 느긋하기 짝이 없다. 불안함과 경계심이 사라진 고양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제서야 보였다.
세상에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단 한 곳,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이스탄불이다
모든 순간이 이처럼 극적인 여행지가 또 있을까! 이스탄불은 한강 너비의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갈리는 대륙의 시작이자 끝이다. 유럽의 그리스 정교와 소아시아의 이슬람교, 두 종교가 한 사원 안에 머물며 서로 다른 둘을 하나로 합쳐 놓는다. 인류 문명의 역사와 함께 한 이스탄불은 경계 위에 서 있다. 여행자들은 시내버스와 페리를 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유럽과 아시아를 경험을 하는 사이 이 도시의 정체성이 궁금해진다. 너희는 유럽이냐, 아시아냐?
그 여자와 나는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스탄불은 어느 대륙에 속하냐?’로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터키인들은 대체로 유럽의 인류 집단인 코카소이드Caucasoid, 유럽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ㆍ서아시아에 사는 현생인류에 속하고 운동 경기도 그들과 벌이니 유럽으로 봐야 한다는 나의 논리와, 터키가 EU에 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자유에 대한 관점이 유럽의 그것과 다르고 이성의 근간이 이슬람교인 점을 볼 때 아시아일 수 밖에 없다는 그 여자의 논리가 매번 불꽃이 튀었다. 우리가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FIFA가 다음 월드컵부터 터키를 아시아로 조 편성 할 리 없고, 유럽연합이 당장 회원국으로 받아 줄 리도 없는데 우리는 꽤나 진지했다. 하지만 이렇게 싸우는 사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는데 이스탄불에 이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터키 안에서 이스탄불은 별종이고 갈라파고스처럼 독특한 문화를 가진 도시이다. 이스탄불이 어느 대륙에 속하느냐는 질문에 나의 터키인 친구는 ‘이스탄불은 그 어디도 아닌 이스탄불일 뿐’이라고 답했다. 『이스탄불』이란 자전적 에세이를 쓴 작가 오르한 파묵도 터키라는 국가성에 자신을 대입하지 않고 ‘나는 이스탄불 소설가’라고 자신을 한정시켰다. 그들의 말처럼 이스탄불을 한 가지 의미로 국한시키기엔 넘치는 무언가가 있다. 두 문명이 부딪히는 길목에서 유럽의 것들을, 아시아의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체득시켰다. 도시의 운명이었고, 그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경계가 아닌 관문으로써 자유로운 자격을 누릴 수 있었다.
경계에 산다 함은 다른 세상의 위협을 안고 산다는 뜻이며 이스탄불은 이를 증명하듯 그 위태로움을 역사로 보여준다. 동로마제국의 땅이었다가 오투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희생양이 된 중세를 거쳐 현대사에서는 1차 세계대전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차례로 점령했던 모두가 탐내는 땅이기도 하다. 도시 이름은 그 역사만큼이나 화려하다. 지배 집단에 따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리다가 끝내 이스탄불Istanbul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스탄불 사람들은 길고양이를 박대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고양이에게 물과 사료를 챙겨 줄 뿐 그들을 가두거나 행동에 간섭하지도 않는다. 그저 도시의 일부분으로 여기며 그들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여행자들은 당신의 정체성을 묻지만 경계에 살고 있는 이스탄불 사람들은 도시의 역사처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곳 길고양이처럼 이스탄불은 누구든 이 곳에 올 수 있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소유가 될 것 같지만 결코 누군가의 것이 되지 않는다. 경계에 산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이스탄불은 아시아다
내 마음 속 당신은 아시아입니다.
초등학교 때 일이다. 단독주택 2층에 살았는데 현관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던 것처럼 망부석이 되어 꼼작하지 않았다. 나와 고양이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금이라면 ‘넌 어디서 왔니? 밥은 먹고 다니니?’ 살가운 인사를 건네며 살포시 녀석을 건너 집 안으로 들어갔겠지만 그 때는 고양이를 무서운 짐승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고양이를 보고 너무 놀라 반나절 동안 집에 못 들어가고 엄마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린 기억이 있다. 문 앞에서 대치한 그 강렬한 인상 덕분인지 그 후로도 고양이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집 밖에서 만난 길 고양이의 두려움 가득한 표정만큼이나 나도 고양이만 봤다 하면 몸을 움츠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이스탄불 고양이를 만났다. 이건 뭐 세상 다 안다는 표정이 느긋하기 짝이 없다. 불안함과 경계심이 사라진 고양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제서야 보였다. 잠시 낮은 담벼락에 앉아 있으면 내가 지들을 두려워하거나 말거나 나 좀 보라며 몸을 비빈다. ‘어쩌지? 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어쩌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이 지들 딴에도 신선했던지 곁을 떠날 생각을 안 한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뭐 그렇게 자기한테 작업을 거는 거라고 생각했나? 고양이와 나 사이, 그렇게 거리가 좁혀졌다.
때론 오지랖 넓은 고양이를 만나기도 했다. 사진이라도 찍을라 치면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쫙 벌려 누가 봐도 보기 민망한 자세를 취해 준다거나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오는 녀석들 말이다. 그 모습이 꼭 이스탄불 사람들 같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Bosphorus Straits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를 나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줄긋기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들의 오지랖 말이다. 한 번은 집 앞 산책로에서 방송 촬영을 마주했다. 그 남자에게 ‘거기, 싸이 닮은 사람. 이리 와서 방송 출연 좀 하고 가라’며 가던 길을 멈춰 세웠다. 할 수 없이 촬영에 임했지만 출연료나 기념품은커녕 시청자를 위해 강남스타일을 춰 보라며 끝까지 무리한 요청을 하는 통에 꽤 애를 먹었다. 축구 경기장 앞에서는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고 자기네 응원가를 알려 주겠다며 따라 해 보라는 무리를 만났고 시장에서는 ‘차이’(터키식 홍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붙잡아 세우기도 했다. 이게 우리가 유럽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던가? 어차피 지리적 경계는 애매모호 하니까 굳이 아시아냐, 유럽이냐의 경계를 두어야 한다면 ‘기질’에서 공통점을 찾는 게 낫겠다.
이스탄불과 비슷한 도시도 있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아프다고 하면 동네 약사들이 모두 모여 병을 걱정해 줬고 병원에 가서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지극 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았다. 가만, 세계지도를 들여다 보니 스페인과 터키는 같은 위도 상에 있다. 위도가 같다는 이야기는 기후적으로 흡사하고 기질적으로 유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또 어떤 나라가 있을까? 이란, 중국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 일에 유독 호기심이 많은 민족들이다. 뭔가 공통점이 보이는데 듯한데? 아시아냐 유럽이냐를 두고 다투지 말고 이렇게 위도상으로 묶는 게 문화적, 기질적으로 비슷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어차피 분명한 지리적 실체도 역사가 변화함에 따라 계속 달라졌으니까 말이다. 내 마음 속 이스탄불은 아시아이다.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