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와. 어서 앉아. 끝을 보자고!
칠레 발디비아에서 만들었던 『한 달에 한 도시』
그러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불도저 정신만 가진 사람 옆에 나무늘보 같은 내가 있으니 말이다.
진격의 그 여자
진격의 그 여자는 늘 이런 태도이다. 목적지는 정해졌다. 딴짓 하지 말고 고개 숙이고 페달만 밟아라!
이 글을 함께 쓰고 있는 그 여자와 나는 부부이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여행하듯 살며 길 위에서 글을 쓰고 생계를 꾸려 나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해외 여행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맞다. 여행 중에는 우리 눈에도 핑크빛 필터가 끼워진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매 순간 하하호호 하고 웃음꽃이 핀다. 사회가 정해 놓은 성 역할에 따르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누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선택한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완벽한 평등의 관계로 살다가 업무의 파트너가 되는 순간 서로가 일의 주도권을 잡겠다며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려고 온갖 수단과 고집을 부린다. 이보다 모순된 관계가 있을까?
글은 혼자서 쓰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함께 기획하고 서로가 가장 가까운 편집자 역할을 한다. 상대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글을 공개할 수 있는 시스템이니 함께 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어려움의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낯선 길 위에서 진로를 바꾸고 이전에 해 본 적 없는 일을 함께 시작했으니 그 속내가 어떠했을까.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곳, 칠레 발디비아에서 하숙집을 구하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눈 뜨면 글 쓰고, 밥 먹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지치면 빵 먹고 잠드는 생활을 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의 첫 책 원고 작업을 위해서였다. 칠레 와인이 맛있다는데 와인은 무슨! 여행 한 번 못하고 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여자 같은 파트너는 이전에 만나 본 적 없다. 기업 창업자의 자서전에서나 볼 법한 불도저 정신은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업무 스타일이 그러해도 성과만 좋으면 용서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런 사람과 24시간 함께 산다는 건 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견뎌야 하는 시험 기간 같다. 맙소사! 다행히도 일할 때만 그 모습이 나오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할 판이었다.
나란 사람은 좀 천천히 가도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 여자의 업무 뒤치다꺼리하다가 내 일은 뒷전이고, 덕분에 성과가 나지 않으니 그 여자는 나를 일 못 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어 버렸다. 빠듯한 스케줄에 맞춰 일하고 자신의 할당량이 끝나면 당연히 상대방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여자의 태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여자는 평소에는 잠옷 바람으로도 비행기를 탈 수 있고,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척추가 없어진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무신경하고 게으른 사람이다. 또한 주위 사람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아 타인에게 관심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다가 분명한 목표를 눈앞에 주어지면 주변 상황과 사람을 휘두르면서 불나방 마냥 앞뒤 안 가리고 불 속으로 달려드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불도저 정신만 가진 사람 옆에 나무늘보 같은 내가 있으니 말이다. 그 여자 혼자 사업이라도 했으면 쫄딱 망했을 텐데 내가 보완해 줄 수 있는 글을 함께 쓰고 있는 건 신의 뜻이라고 해두자.
끝을 못 내는 남자
이리와. 어서 앉아. 끝을 보자고!
그 남자와 나는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봉투를 누가 버릴 것인지를 두고는 싸움이 일지 않는다. 각자 좋아하는 집안일을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인내가 부족한 이가 자발적으로 두 손을 걷어붙인다. 더러움을 끝까지 참아내는 자가 집안일을 덜 하게 되는 구조랄까? 뭐, 둘 다 참을 수 있으면 더럽게 사는 거지. 대신 일 할 때는 싸움이 격렬해지고 그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를 반으로 접으면 어느 도시가 나올까? 발디비아는 동쪽으로 안데스 산맥, 서쪽은 태평양 연안에 접한 인구 15만 명의 소도시이다. 도심을 고요히 가로 지르는 강가를 산책하거나 시장 상인들에게 남은 생선 찌꺼기를 받아먹고 사는 넉살 좋은 바다사자를 코앞에서 구경하는 일 외는 할 일이 없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첫 책, 『한 달에 한 도시: 유럽편』 원고를 집필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9시까지 마주 앉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우면서 작업을 했다. 세상 둘도 없는 친구였다가 하루아침에 남이 될 수 있는 사이가 부부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남자가 일머리가 없는 사람인 건 연애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일을 기한 내에 처리하지 못해 동료들을 주말에 불러내었다. 영화제 스텝 모두가 그가 맡은 업무를 도와야 했다. 다들 어찌나 착하던지 나처럼 씩씩대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그 날 이후부터 나한테 찍혔다. 일 못 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이런 확신을 굳히는 시간이 더해질 뿐이었다. 남자의 장점은 저 멀리 우주로 날려 버리고 발디비아까지 ‘자기 일도 제대로 못 끝내는 사람’으로 확신 굳히기가 이어졌다.
사실 어느 정도 이 확신이 틀린 건 아니다. 남자는 벌여 놓은 일들은 많지만 뭐하나 끝을 내는 성격이 못 된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겠다며 80만 원어치 교재를 사 놓고서 한 권도 못 끝냈다. 살을 빼겠다며 체육관을 등록하고 삼 일도 못 채우고 회원증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하다못해 연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질질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그 남자와 사귀기 전, 직접 목도했다.- 그러니 책 한 권을 넘겨야 하는 그토록 힘겹고 버거운 과정을 그것도 여행 중에 해내야 했으니 남자의 성격상 꽤 어려운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고충을 이해하기에 내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않다. 이미 내 안에는 그 남자가 나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남자는 평생 글이라고는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비문은 물론 한 문장에 하나씩은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려 있었다. 그나마 나는 여행 전 하던 일을 통해 문장을 접해온지라 사정이 나았다. 본의 아니게 남자의 선생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말하는 세련된 어법을 배우지 못해서 남자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못된 년인지 말이다. 끝을 향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남자는 차근차근 스텝을 밟으면 디테일을 챙기는 사람이다. 그가 없었으면 끝은 내었을망정 완성도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결과물이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남자에게는 내가 필요했고 나는 그이가 필요했다. 우리는 둘이서 겨우 1인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네 권씩이나 결과물을 내었으니 꽤 효율 높은 한 몫 아닌가. 아차! 쓰고 보니 여기서도 질보다 양이네. 이놈의 몹쓸 성과주의.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김은덕>,<백종민> 공저16,200원(10% + 5%)
여행을 둘러싸고 수많은 트렌드가 등장하고 사라졌다. 때로는 여행 방법 자체가 주목받았고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이 여행의 트렌드를 바꾸기도 했다. 여행이 끊임없이 트렌드를 바꾸는 이유는 단 하나다. 새로운 것을 보고 낯선 사람을 만나며 매일매일 다를 바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얻고 싶어 떠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