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괴물이 되지 않으려 애쓰기
‘군대는 아니지만 군대 같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변함없는 악인이었고 동조자였음을, 유해한 작은 괴물이었음을 늦은 밤 떠올리고는 한다.
출처_imagetoday
2016년이 가는데, 쓸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감을 앞두고 다른 글에서 영감을 받으려고 <솔직히 말해서> 코너를 모두 뒤지다가 2015년 말에 소개된 군대에 관한 글(‘바나나 우유 잘못 마셨다고 때리기 있기 없기’ )에 영감을 받아, 군대 비스름한 내용을 쓸까 한다. 참고로 군대에 간 적은 없다.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들었다. 대부분의 기수제 동아리들은 전통이라는 게 하나씩 있게 마련인데, 예체능 계열은 특히 전통이 위계와 폭력일 때가 많다. 예를 들자면 1학년이 동아리에 처음 들어가면 한 달 동안은 언제 어디서 선배들을 만나든 쩌렁쩌렁 울리도록 자신의 관등성명을 대며 90도로 인사를 한다든지, 별 쓸모없는 규칙과 문장을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지, 밑도 끝도 없는 상명하복식 전통들.
나는 규율과 법칙과 전통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모이라면 모이고, 크게 소리를 내라면 내고, 존댓말을 쓰라면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나는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습 시간은 계속 늘어나는데, 못한다고 혼을 내면서 연습은 하지 않고 모여 앉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선배의 수다를 듣는 게 효율적인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근데 우리 왜 연습 안 해요? 시간 아까워요."
말이 끝나자 빠르게 굳던 표정을 기억한다. 전통적인 행사 중에는 '디데이'라는 것도 있다. 동아리 좀 했다 하는 사람이면 명칭에서 맡아지는 냄새와 같이, 선배들이 후배들을 불러 모아놓고 무조건 굴리는 날이었다. 엎드려 뻗친 채로 괴성과 윽박지름과 내 언사가 부적절했다는 평가 내지는 비난이 쏟아졌다. 태도가 불량하고 선배를 선배같이 안 본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굳이 옮기자면 '선배를 X같이 본다'였다) 나는 사실 그 순간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윗사람한테는 시간 아깝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이해했다기보다 암기했다.
그걸로 끝이었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조금 더 말해보겠다. 공연을 한 달여 앞두고는 음향과 무대를 다 세팅해 놓고 선배들을 초청해서 보여주는 디데이 날이 있었다. 공연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연기로 대학 가겠다는 연극과 지망생들은 절대 연극판에 발도 들여놓을 생각 말라는 재능의 종언을 들어야 했고, 선배들 입장에서는 쌍시옷 쌍비읍 등 한국어의 된소리 발음으로 시작되는 비속어를 몇 분 동안 계속할 수 있는지 경연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망의 피날레는 스무 장쯤 이어붙인 전지에 포스터물감을 열 통쯤 칠해서 만든 무대 배경 그림을 장렬하게 대선배(대학에 들어간 선배를 대선배라고 했다. 대학의 大였는지 크고 위대하다는 大였는지 잘 모르겠다)가 쫙쫙 찢으면서 ‘공연 올리지 마 시키들아’ 하는 것으로 마무리.
후배들도 나름의 매뉴얼이 있었는데, 배경이 찢기기 전에 반드시 선배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우리가 잘못했고 더 잘해서 공연을 올리겠다고 싹싹 빌 것. 결연한 의지를 대들지는 않되 단호하게 보여줄 것. 마지막은 그래 우리 잘해보자는 말을 듣고 눈물 콧물 쓱쓱 닦고 술판 혹은 떡볶이판을 벌이는 정도가 정해진 각본의 끝이었다. 각본과 매뉴얼은 좋은 것이다. 깔끔하고 자세할수록 좋다. 대들지는 않되 단호하게 보여줄 것, 이 부분이 제일 모호했지만 어느 정도 눈치로 극복했다.
공연 준비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스트레스는 극에 달할 때였다. 이게 무슨 헛짓거리지. 병정놀이(병정에게 미안하다!)는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비합리적인 상황에 부닥치면 어떻게든 합리화를 시켜보려고 한다. 비합리적이니까. 그 당시 합리적 인간이 되려고 애쓴 추론이 뭐냐면
1) 공연은 힘들다. 제때 풀어주지 않으면 병이 난다. 그래서 더 힘들게 만들어 펑펑 울게 만든다. 한참 울면 개운하고 어째 집에 가서 빨리 자고 싶고 그러면 피로가 풀린다.
2) 동아리 내에 술집 사장이나 떡볶이집 사장과 모종의 계약을 맺은 주체가 있다. 1년에 한 번 매출을 올리기 위해 이 난리를 친다.
3) 여기는 희망이 없으니까 도망치라는 유경험자들의 따뜻한 배려
답은 그냥, 그냥이었다. 2학년은 3학년이 시키니까, 3학년은 이제까지 그래왔으니까, 그냥. 모기 때려잡듯 후배를 때려잡던 선배는 문득 "이게 뭐라고 우리 이러고 있냐."고 말하는 걸 보면, 누구도 이 체제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동기들은 후배를 받을 때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엎드려뻗쳐는 '되도록' 시키지 말자. ‘급한 일이 있다면’ 집에 보내자. 윗세대의 악습을 그대로 물려주지 말자. 개중에는 당한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선한 다짐이었다.
1학년이 들어오자 우리는 선심 쓰듯, 우리 기수한테는 인사 안 해도 되니까 윗 기수들한테만 인사하라고 했다. 가끔 별 마음 없이 후배들이 잘해주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군다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나는 누구보다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큰 목소리를 내면 불합리한 얼차려 없이 모든 게 조용해지고 '효율적'이니 편하다고 생각했다. 괴물이라고 여기던 자들보다야 작았지만 여전히 괴물은 괴물이었다.
전통을 지키지 않은 덕인지, 재미가 없어보였는지, 곧 연극부는 없어졌다. 모든 것이 빠르게 망해간다고 생각할 즈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빠르게 망하는 세상을 보았다. 그렇게 망해도 아직 망할 게 남아있다니 이 사회는 정말 화수분 같은 곳이라고 오히려 안도했다. 아마 소크라테스가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쓸 때도 세계가 이따위로 돌아가면 곧 멸망하리라고 생각했겠지.
안현미 시인의 시구를 패러디하자면, '군대는 아니지만 군대 같았다'. 그래서 유사 군대 문화를 체험하고 남은 건 뭐였나.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음 이 정도면 10점 만점에 3점 정도 됩니다, 하고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자세?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까진 하지 않잖아, 하며 과거와 현재를 꼰대 스타일로 비교하는 일?
당한 내용과 목격한 불합리를 신나게 ‘썰’로 풀고 끝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변함없는 악인이었고 동조자였음을, 해로운 작은 괴물이었음을 늦은 밤 떠올리고는 한다. 우리 때는 더했어, 하고 넘기는 일들이 얼마나 이 난장판을 만드는 데 일조했는지, 하고 있는지, 앞으로도 계속될 건지 생각하면 입 안이 마른다. 작은 인간들이 모여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나.
폭력은 도처에 있었다. 누군가 재미로 휴지를 조각내 창문에서 뿌렸는데, 선생님이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와 죄 없는 한 명을 붙잡아 왜 휴지를 던졌냐며 머리채를 붙잡고 때리다 성이 안 풀려 구둣발로 밟는다든가, 맞은 편 집에서 저녁 시간에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자식의 비명소리와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난다든가 하는 공기 같은 예시들. 그런 날 빼고는 늘 괜찮았다.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 게, 내가 저지른 일 중에 가장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폭력은 인간이 인간 위에 서 있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나이나 경험, 기타 사소한 차이는 그저 내가 너보다 위에 있고 싶어서 갖다 댄 소재에 불과했다.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나는 서울 사람이니까, 내가 너보다 이 분야에서 오래 있었으니까. 이유는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식은죽 먹기다. 어떤 이유로든 위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경험한 사람은 오히려 권력의 충실한 대리인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웃고 넘어갈 만한 어린애 장난 같은 권력이라도 욕망은 끝이 없고 누구도 체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걷잡을 수 없어지기가 쉽다.
쓰다 보니 길어졌다. 군필자들이 군대 얘기만 나오면 길어지는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기왕 길어졌으니 사족을 붙이자면,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연극도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나저나 연말인데 다들 공연은 안 보러 가시나. 좋은 연극 공연들이 많다. 예스24에서 연극 공연 티켓도 판다. 참고하시라.
uijungchung@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