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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희망 품기

『라임포토스의 배』 그리고 『이토록 멋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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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냄새 법칙이라고, 세상 어느 곳이든 구린 구석은 있기 마련이고 삶이 계속되는 한 문제는 계속해서 생긴다. 그럼에도 삶을 계속하게 하는 힘은 내일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지금보다 그다지 나아질 게 없는 미래를 인정할 때 인간은 절망한다.

어린 시절 보물 소니 CD 플레이어

 

세계화 시대에 그 어떤 국가라고 한국과 무관한 곳이 있을까 싶지만 일본은 특히 한국과 밀접한 나라다. 많은 한국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비즈니스를 위해, 유학을 위해, 여행을 위해 일본을 직접 찾는다. 요즘은 일본 여행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자동차는 한국 도로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캐논, 니콘, 소니 등 광학 제품은 여전히 일본 제품이 압도적이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소설 한 편 정도 안 본 한국인도 흔하지는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일본에 관한 최초의 기억을 끄집어 내라면 대략 1990년대 초반일 테다. 당시 한국 경제는 IMF 구제금융을 받기 전 한창 고도 성장을 달리던 시절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최초의 문민 정부 탄생으로 사회 전반이 꽤나 밝았다. 문민 정부는 세계화라는 기치를 적극적으로 밀었는데, 외국 여행 한 번이라도 안 다녀오면 세계시민으로서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태어나서 여권 한 번 만들어 본 적 없는 나의 엄마와 아빠도 동남아시아로 1주일간 떠났다. 친구들 부부 동반 모임이라 자식들은 집에 남겨졌다. 지금도 외국을 향한 호기심은 거의 없는지라, 엄마 아빠가 부럽진 않았다. 다만 엄마가 매우 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그런 시기니까.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단박에 깨뜨린 건 아빠 손에 들린 소니 CD 플레이어였다. 크기로 치면 대형견 사이즈. 상단에는 CD 플레이어가, 그 밑에는 테이프 두 개가 돌아가는 구조. CD나 테이프를 공테이프로 동시녹음할 수 있는 놀라운 기계! 당시 나는 누나 방에 가서 몰래 몰래 삼성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다 걸려서 쌍욕 듣던 시절이었다. 이런 내게 CD 플레이어가 생기다니, 게다가 일제란 말이다. 그 시대에 일제는 그런 기호였다. 엄마 아빠가 자식을 쏙 빼놓고 생애 최초로 외국여행을 갔는데, 삐친 자식을 달래줄 선물로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는 명품. 꼭 일본에 여행 가지 않아도, 응당 일제를 사야 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마침 소련이 붕괴된 지 얼마 안 지난 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자본주의 만세, 세계화 만세, CD 플레이어 만세. 헤비메탈 만세.

 

그 뒤로 20여 년이 흘렀다. CD의 자리를 mp3가, mp3를 스트리밍 서비스가 빠르게 대체했다. 나는 여전히 CD를 소장용으로 사지만 mp3로 굽고는 쓰다듬어만 준다. 동남아에서 건너온 소니 플레이어는 몇 번의 이사를 거친 뒤 내 공간에서 없어졌다. 일본을 향한 막연한 동경도 변했다. 일제 밥솥이 만들어준 밥을 먹고 등교 길에 일제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으며 수업 시간에 일제 볼펜으로 필기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카메라는 여전히 일본 제품을 쓰지만, 내 생활에 일제가 관여하던 부분이 많이 없어졌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이후 다른 곳에서도 벌어진 풍경일 테다.

 

 

연봉 1,700만 원이 일본 대졸 초임 연봉이라고?

 

그리고 2016년. 개인적으로는 올해만큼 일본과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일본 미스터리를 꽤 많이 읽었다. 예전에 나온 작품이긴 한데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올해 읽은 외국소설 중에는 최고다. 미쓰다 신조의 『흉가』, 올해 읽은 공포물 중에 가장 재미있다. 마야 유타카의 『날개 달린 어둠』, 올해 읽은 신본격 미스터리 중에 가장 엉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쿄에 갔다. 현지 가이드가 붙는 여정이었는데, 가이드 분은 3박4일 내내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일본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에이 무슨 소리. 아무리 20년 동안 성장 안 했다곤 해도, 여전히 세계 3위 경제 규모고 1인당 GDP도 2016년 기준으로 37,304달러로 한국의 27,633달러보다 1만 달러나 많은데? 도쿄 상가를 걸으면서 본 아르바이트 구인 정보에는 시급 1,050엔에 16시간 노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16시간 노동이라는 게 많이 살인적이지만, 어쨌든 저 조건대로 일한다면 아르바이트만으로도 한국으로 치면 대기업 신입 연봉 부럽지 않을 액수다. 가이드 분 엄살이 좀 심하시네, 하고 넘기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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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본 일본 소설이 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라임포토스의 배』였다. 이 책에는 두 편의 중편 소설이 실렸는데, 인상이 더 강했던 작품은 앞에 수록된 ‘라임포토스의 배’다. 소설 속 주인공 유키코는 지방대를 졸업하고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회사에 취직한다. 연봉이 163만 엔. 지금 환율로는 한국 돈으로 1,700만 원 정도다. 우리가 아는 일본의 최저 시급과는 다소 다른데, 일본은 지역별로 최저 시급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도쿄의 시급을 이야기하지만, 지방의 최저 시급은 더 낮다. 도쿄에서 많은 사람이 산다고는 해도 절반 이상은 지방 거주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라임포토의 배』는 일부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더 보편적인 사례로 읽힐 수 있겠다. 이야기에는 유키코 외에도 대학 동기 3명이 등장한다. 카페 사장인 요시카, 전업 주부 소요노, 이혼하려 하는 리쓰코 등. 철없는 소요노를 제외하면 사는 게 다 팍팍하다. 계약직, 영세 자영업자, 경력단절로 힘들어하는 이혼 여성 등등.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아마도 나는 지난주, 걷잡을 수 없이 일하기 싫었던 것이리라. 남 일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공장 월급날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며 늘 마찬가지인 박봉 명세서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이상해진 모양이다.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14~15쪽)

 

연봉 1,700만 원. 충분하다면 충분한 돈이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확실한 점은 사회 복지가 탄탄하지 않은 사회에서라면 재생산을 선택하기보다는 포기하는 게 합리적인 액수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주인공은 결혼은커녕 연애를 꿈꾸지 않는다.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한국사회와 일본사회의 유사성 때문인지 일본에 관한 책은 늘 나왔지만, 올해도 많이 출간됐다. 예스24 오늘의 책에 선정된 것 중 대충만 꼽아도 『우리는 일본을 닮아가는가』, 『2020 하류 노인이 온다』, 『일본 디플레이션의 진실』, 『정해진 미래』 등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다뤘다. 대부분 위기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데 탄성보다는 한숨을 유발하는 내용이다. 저성장 저출산 저임금 고령화 고실업에 대한 대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펴든 책이 『이토록 멋진 마을』이다.

 

 

후쿠이에서 희망 찾기

 

부제 ‘행복동네 후쿠이 리조트’에서 보듯, 이 책은 희망을 전하려고 한다. 위기가 일본에 있다면, 해법도 일본에 있을 것이다. 대충 이런 의도로 한국에 소개된 르포 에세이로,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지역인 후쿠이의 사람과 기업, 산업을 다뤘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여 도쿄로의 쏠림이 심하다. 후쿠이는 중심지 도쿄에서 꽤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의 인구는 약 79만 명. 그런데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후쿠이는 행복도, 초등생 학력평가, 노동자 세대 실수입, 대졸 취업률, 정사원 비율, 보육원 수용률 1위를 자랑한다. 비결은 무엇일까. 이런 호기심을 안고 저자는 후쿠이를 취재하기 시작한다.

 

『이토록 멋진 마을』은 르포 에세이라는 장르 특성상, 기승전결이 깔끔하게 나눠 떨어지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글은 아니다. 한 편의 글이 짧게는 3쪽 길어도 10쪽 정도로 전체적으로 호흡이 짧은 글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다. 장별로 화제가 널뛰기 하는 부분도 있는지라, 읽기에 따라서 다소 산만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후쿠이의 강점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후쿠이의 강점을 살피기 이전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998년을 언급하는 대목이었다.

 

1998년 일본 사회는 전후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토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해는 일본의 자살자 수가 급증한 해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연간 2만 명대 전반을 유지하던 자살자 수가 3만 2,863명으로 치솟았다. 이후 13년간 3만 명대가 무너진 적이 없었다. (중략) 1998년을 기점으로 고용자 임금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바뀌었다. 임금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특히 보너스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비정규직, 저임금 등 오늘날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가 1998년에 시작된 것이다. 비정규직 고용과 저임금의 영향을 받아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만혼과 저출산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금융 자산 제로 시대, 즉 저축이 전혀 없는 가정이 늘고 중산층이 줄어든다. (228~230쪽)

 

한때 일본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평등한 나라였다. 수치화한 소득불평등이나 자산불평등을 따지면 사정은 다소 달라지겠지만, 1973년 총리부 조사에서 자신이 ‘중류’라고 간주한 답이 90%를 넘었다. 이른바 ‘1억 총 중류’라는 의식이다. 그랬던 일본이 1990년대부터 저성장에 접어들고 결정적으로 1998년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하류 사회’로 변했다. 1998이라는 숫자는 한국에도 낯익다. 한국 역시 그 즈음이 IMF가 처방한 구조 조정을 적극적으로 단행한 시기다. 후쿠이 역시 위기를 맞았다. 세계 시장을 압도적으로 장악했던 안경태 제조 산업이 중국의 가격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1991년 사바에 시내에는 894곳의 안경사업체가 있었다. 2008년 그 수치는 519곳으로 급감한다. 중앙 정부와 지역 산업 모두가 위기에 빠졌을 때, 후쿠이가 찾은 답은 무엇일까.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대강 이런 내용이다.

 

1. 살아 남은 기업은 강해진다.

 

“섬유와 칠기는 사양이라고 말합니다만 어느 사장님은 이렇게 웃어넘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양 사양,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무엇이 왜 사양인가. 첨단을 향해 진행되는 산업 속성상 이전 것은 언제나 사양이 될 수밖에 없을 뿐이다’라고요.”
업계 전체는 사양일지 몰라도 살아남은 기업은 오히려 강해졌다. (176쪽)

 

2. 워킹맘도 육아 스트레스 덜 받고 일할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맞벌이는 세대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후쿠이에서는 부지런한데다 평생 현역이고, 여성이 사회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맞벌이 비율이 일본 내 1위이고 직장에서 남녀가 만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혼해 출산하면 주위에서 그들을 도와주고 여성은 다시 나가 일을 하니 출생률이 높은 것도 당연하다. (270쪽)

 

3. 맞벌이 부부가 노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육이 세련되어야 한다. 특히 공교육이. 후쿠이는 사교육 덜 받는 환경에서 교육 성취도가 높다.

 

문부과학성이 해마다 실시하는 ‘전국학력평가’에서 후쿠이현의 초중학교는 아키타현과 늘 전국 수위를 다툰다. 2014년에도 초등학교 2위(아키타현 1위), 중학교 1위(아키타현 2위)로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였다. 체육 분야에서도 전국 1등이다. 후쿠이현은 학원에 다니는 학생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 낮다. (238쪽)

 

4.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가족이 그 답이다.

 

한 지붕 아래 3세대가 같이 사는 가정이 보편적이고, 한 가족 안에 제1~3차 산업 종사자가 두루 있습니다. 지역경제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증거지요. 모든 산업이 웬만큼 유지되는 겁니다. 게다가 1인당 소득이 높지 않더라도, 3세대 4명이 함께 일한다면 가구당 수입은 꽤 높아집니다. (131쪽)

 

5. 국가가 지방을 책임질 수 없다. 해법은 지방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결국 지역의 과제는 문제에 직면한 지역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국가적 정책은 지방에서 효과를 내기 어렵다. ‘향토주의’가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66쪽) 안목 있는 ‘토박이’가 ‘외지인’과 ‘젊은이’를 불러모아 본질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마을에 에너지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121쪽)

 

물론 후쿠이라고 모든 게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똥냄새 법칙이라고, 세상 어느 곳이든 구린 구석은 있기 마련이고 삶이 계속되는 한 문제는 계속해서 생길 것이니까. 그럼에도 삶을 계속하게 하는 힘은 내일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지금보다 그다지 나아질 게 없는 미래를 인정할 때 인간은 절망한다. 이 책은 그래도 아직 일본 사회든 한국 사회는 시도해 볼 게 꽤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헬조선에서 벗어나기를 위한 첫 번째 발걸음, 희망 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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