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택용의 책과 마주치다
햇볕이나 미세먼지 농도 따위와는 상관없이 마스크를 쓰는 이들은 정해져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정자 아래 장기판은 온종일 돌아간다. 다들 열심히 뭔가를 하지만 장기판의 말이 되어 각자의 수만 읽고 있는 곳, 스러지는 오후 햇살이 왠지 쓸쓸함을 더해 주는 곳이 근린공원이었다.
도봉근린공원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잎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즘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 권혁웅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에 수록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권혁웅 저 | 창비
시대 풍자의 묘미를 보여준 『소문들』(2010)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들이 어울려 지지고 볶는”(오연경, 해설) 삶의 현장을 조망하는 명료한 시선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일상의 다채로운 풍경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관련태그: 도봉근린공원, 권혁웅, 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 마스크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뒤 불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관뒀다. 사진이 가장 쉽겠거니 지레짐작하고 덤볐다가 여태껏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개인 사진집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1,895일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와 고공농성과 한뎃잠을 찍은 《외박》이 있다.
<권혁웅> 저8,550원(5% + 2%)
미당문학상을 수상하고 ‘미래파’ 논쟁을 주도했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권혁웅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대 풍자의 묘미를 보여준 『소문들』(2010)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들이 어울려 지지고 볶는”(오연경, 해설) 삶의 현장을 조망하는 명료한 시선과 풍부한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