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끝났을 때 일상은 무너져 내린다 – 연극 <안녕, 여름>
하나의 공간에 담긴 다섯 개의 사랑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랑 이야기로 가을의 감성을 자극한다
우린 이미 끝났던 거야
부부의 일상은 평범해 보였다. 아내는 몸에 좋다는 차를 끓이고, 기사를 스크랩하고,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에게 건강 생각도 좀 하라며 잔소리를 했다. 남편은 차가 맛이 없다며 투덜댔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말에 ‘내 밥은?’이라며 철없는 소리를 늘어놨고, 같이 여행을 가자는 말에도 심드렁했다.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한 풍경과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두 사람의 관계가 위태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아내는 이혼을 말했다. “우린 이미 끝났던 거야.” 그녀의 한 마디를 기점으로 부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내 여름이 남편 태민을 떠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객은 추측을 시작한다. 무관심에 지쳐서? 집으로 여자를 불러들여서? 유명 사진작가였던 그가 1년 가까이 반백수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일견 합당해 보이는 이혼 사유들이지만, 연극 <안녕, 여름>에서는 그 무엇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여름과 태민 부부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진실은 두 사람이 함께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났던 시간 속에 감춰져 있고, “다시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싫어.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도 없잖아.”라는 여름의 말 속에 잠들어 있다.
연극 <안녕, 여름>은 일본의 유명 극작가 나카타미 마유미의 ‘This Time It’s Real’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결혼 6년차 부부 태민과 여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드라마 <워터보이즈>, 연극 <뷰티풀 선데이>로 유명한 나카타미 마유미는 이 작품과 관련해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가능한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국내에서 연극으로 다시 태어난 <안녕, 여름>이 전하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작품은 소중함을 잊고 지냈던 관계들이 사실은 우리 일상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그 관계가 끝났을 때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일상을 통해 명징하게 보여준다.
한 공간, 다섯 가지 사랑 이야기
<안녕, 여름> 안에는 다섯 가지 빛깔의 사랑이 담겨 있다. 태민과 여름 부부를 중심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 동욱, 란, 조지의 이야기로 가지를 뻗어간다. 배우를 꿈꾸는 란은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로, 그녀에게는 남자도 연애도 쉽기만 하다. 태민의 후배인 동욱은 소심하고 어리숙한 모태솔로이지만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란에게 다가선다. 중년의 게이 조지는 휘청거리는 태민의 곁에서 살뜰하게 그를 챙겨주면서, 란과 동욱의 엇나가는 감정을 보듬어준다. 여름과 태민이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사랑했던 것처럼 동욱, 란, 조지 역시 각기 다른 사랑의 방식을 보여준다.
철부지 남편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태민’은 배우 송용진과 김도현, 정문성이 연기한다. 개성 강하고 다채로운 인물들을 연기해 온 이들은 <안녕, 여름> 안에서 평범한 남편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억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목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언제나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여름’ 역에는 배우 최유하와 최주리가 더블 캐스팅됐다. 팔색조의 매력을 가진 최유하와 자신만의 드라마를 가지고 연기하는 최주리, 두 사람이 연기할 ‘닮은 듯 다른’ 여름의 모습이 기대된다.
이밖에도 떠오르는 배우 이종욱과 김기수가 ‘동욱’으로, 경쾌한 에너지를 가진 배우 김두희와 안은진이 ‘란’으로 함께한다. 30년 이상의 연기 경력을 가진 배우 이남희와 조남희는 유쾌한 인물 ‘조지’를 연기하면서도 묵직하게 작품의 중심을 잡아준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연극 <안녕, 여름> 안에는 웃음과 눈물이 감춰져 있다. 촉촉하게 감성을 적시는, 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공연은 10월 30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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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