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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천명관 "기억으로 환치된 시간을 문자로 남기는 일"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만난 작가들 ⑭ 소설가 천명관
그리고 작가의 일은 그 기억으로 환치된 시간을 문자로 남기는 것입니다. 파편화된 사건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들에 일정한 형식으로 만드는 일일 터인데 그것은 매우 특권적이지만 그만큼 어려움이 있습니다.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한국문학번역원 주최)>의 참가작가 릴레이 인터뷰의 마지막은 천명관 소설가 차례다. 축제의 첫 날, 작가는 미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밴을 포함한 국내외 작가들과 어울려 '서울'을 더 색다르게 경험한다. 소설가 천명관이 말하는 '남자의 세상'을 들어보자.
곧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신작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면.
한 마디로 뒷골목에 떠도는 건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거창한 제목과 달리 남자들의 허세와, 위악,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어리석음에 대해 다소 황당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보았습니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에서는 건달들마저도 청년실업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다이내믹한 청춘을 보낸 한 사람으로서, 작가님이 겪었던 청춘의 이야기와 이 땅의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나에겐 청춘이라고 할 만한 시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먹고 사느라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해 여유가 없었어요. 지금 돌아보아도 나에게 청춘의 시절이 부재했다는 것이 인생에서 뭔가 소중한 게 결락된 것처럼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뭐라고 해줄 얘기도 없습니다.
말년에는 한국형 범죄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에서는 뒷골목 건달들의 세계가 그려지고 있는데요. 소설가 천명관이 써보고 싶은 한국형 범죄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요?
아직 특별한 구상이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어떤 범죄소설을 쓰게 될지 명확한 비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장르적인 요소를 많이 활용하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이번 소설도 누가 봐도 진지한 본격문학은 아닙니다. 또한 특정장르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뒷골목 건달들의 얘기를 범죄소설풍으로 썼지만 장르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겐 본능적으로 삐딱한 장난기가 있어요. 그래서 자꾸 비틀고 싶어지고, 엉뚱한 상상과 플롯이 끼어드는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잡종(하이브리드)소설이 나온 것 같습니다(웃음).
텍스트가 영상으로 옮겨지는 작업의 매력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작가님의 원작이 많이 각색되는 부분에서는 물론 원작자로서의 아쉬움이 크실 것 같은데, 혹시 영상화 작업에서 더 색다르고 재미있어졌다고 느끼는 작품이나 장면도 있으신가요?
텍스트는 모든 이야기 예술의 근간이 됩니다. 영상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을 아쉬워하거나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창작과정이기 때문이죠. 나는 영화작업을 오랫동안 해봐서 그것을 잘 이해하는 편입니다.
작가님의 작품에는 주로 길바닥이나 뒷골목 인생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조금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충무로 인쇄골목이나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처럼, 작가님이 즐겨 찾는 ‘골목’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주변에 보면 뒷골목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평생 책상에만 앉아 있었을 것 같은 그런 부류 말이죠. 희랍인 조르바는 그런 부류를 종이만 씹어먹는 염소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여행을 다녀도 박물관이나 미술관보단 주로 뒷골목에 관심이 많아요. 그곳에 진짜 삶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촌스러운 감각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감독 말고는 모든 일을 다 해봤다”고 말하실 만큼, 다양한 이력을 쌓으셨습니다. 사회의 면면을 두루 경험해보셨겠지만, 다음 작품을 위해 취재해보고 싶은 색다른 직업이나 특수한 분야가 또 있으신지요. 아니면,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다른 직업이 있으셨다면?
감독 말고 모든 일을 다 해봤다는 건 과장된 말이고요. 난 그저 다양한 삶의 극히 일부분만 경험했을 뿐이죠. 그래도 책상에만 앉아있진 않아 비교적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뜻일 터인데 문단이 철저히 제도화, 권력화 되면서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진입할 수 없는 장벽이 생겼습니다. 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면 비즈니스맨을 해보고 싶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시절까지 포함해 이십 년 넘게 창작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사람들과 어울려 비즈니스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요.
누가 더 실패자인가를 겨루기라도 하듯, 사회에서 잉여인생으로 기록될 인물들이 한 지붕아래 모이게 되는 『고령화 가족』을 인생 깊게 보았습니다. 작가님의 가족이 모이는 풍경이 궁금합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짐스러워하기도 하고 온갖 애증이 얽혀있지만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돌아보면 눈물나는 그런 여느 가족과 다름이 없습니다.
소설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희곡으로 고쳐 연극화하기도 하셨습니다. 영화의 맛과 또 다른 연극의 맛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세요.
무대에서 펼쳐지는 라이브의 느낌이 좋아요. 배우의 입과 몸짓을 통해 표현되는 방식이 매력적인 거죠. 기회가 된다면 또 연극을 만들어보고 싶은데 그쪽도 환경이 녹록치가 않습니다. 연극을 봐줄 관객도 거의 없어 이젠 지원금으로 유지되는 판이 되었습니다. 안타깝죠.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곧 시작됩니다. 작가축제의 주제 <잊혀진, 잊히지 않는>과 관련되어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그리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작가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궁금합니다.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억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어디엔가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일은 그 기억으로 환치된 시간을 문자로 남기는 것입니다. 파편화된 사건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들에 일정한 형식으로 만드는 일일 터인데 그것은 매우 특권적이지만 그만큼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는 작가적 자의식이 강하지 않아 비교적 그런 어려움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다른 작가는 그 모든 고통과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9월 마지막 주, 대학로에서 그 막을 연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8월의 어느 날. 설렘으로 잠을 설치는 소풍 전야처럼, 9월의 작가축제가 문득 궁금해진다. 작가축제에서 만나 볼 작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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