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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 "나를 사로잡는 도시는 파리"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만난 작가들⑪ 소설가 함정임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저를 사로잡는 도시는 파리입니다. 파리는 그 자체로 박물관이자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파리에서는 거리에 나서자마자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고유명들을 몇 걸음 못 가서 만나곤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파리는 산책이 가장 느리게 진행되는 곳이고, 그래야만 제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한국문학번역원)>에는 국내외 28인의 주목받는 작가들이 참가한다. 관능적 색채와 예상치 못한 솔직함으로 독자를 불시에 덮치는 파나마의 소설가 ‘릴리 멘도사’와 짝을 이루어 ‘작가들의 수다’를 나눌 한국 작가는 다방면의 예술에 조예가 깊고, 지적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소설가 함정임이다.
‘앙토냉 아르토’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 『내 남자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의 어떤 매력이 작가님을 호출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앙토냉 아르토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4년 무렵입니다. 아르토에게 매료된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만났던 두 예술가, 아르테미시아와 나혜석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토를 만날 무렵, 저는 한국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자 소설가인 나혜석을 매개로 장편소설을 완성한 뒤였습니다. 나혜석을 소설 속에 호명한 것은 2000년 무렵이니, 4년 정도 동고동락한 셈이지요. 나혜석의 존재를 제게 환기해준 것은 17세기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입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최초의 여성화가, 곧 서양 최초의 여성화가로 기록되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삶과 예술을 그린 평전 소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민음사,2001)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작가와 소설의 현장인 이탈리아 여러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르테미시아에 사로잡혀 몇 년을 보내고, 빠져나오면서, 제 주위, 곧 한국적인 상황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나혜석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춘하추동』(민음사,2004)이라는 장편소설을 힘겹게 써나가면서 한국과 일본을 답사했고, 그렇게 또 몇 년을 살았습니다. 그녀들로부터 벗어날 즈음, 앙토냉 아르토라는 존재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르토를 잔혹극의 창시자라고 부르는데, 저는 그의 연극론과 시보다 그 자신에 더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를 통해 인간과 광기, 예술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아르토의 힘은 블랑쇼, 들뢰즈, 수잔 손택 같은 매혹적인 문학-철학자들을 사로잡은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광기와 예술의 한계를 끊임없이 반추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시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소설가이신데요. 소설가 함정임의 문학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처음엔 미(美), 곧 예술이었습니다.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 시를 썼습니다. 프랑스시 전공 학회 활동을 했지만, 문학창작 동아리 경험 없이, 혼자 끄적거리듯 썼지요. 기질적인 것, 본능적인 것이었지요. 대학시절 내내 뮈세, 라마르띤느, 베를렌, 랭보, 보들레르 등의 프랑스 시인들의 시들을 암송했습니다. 20대 중반에 난생 처음 쓴 소설로 소설가로 데뷔한 뒤,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도망 다니면서 썼습니다. 시를 외우고, 시를 쓰던 버릇 때문에, 시를 쓰듯 소설 문장을 써나갔습니다.
제목과 첫 문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쉼표 같은 부호,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사이의 전환과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시적인 것에서 산문적인 것으로의 이행이 필요했고, 이런저런 실패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삶이 미에 앞선다는 것, 삶과 경쟁하지 않은 미란 공허하다는 것, 신산스러운 삶을 통과한 미라야 겨우 조금 돌아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이나 문학적 신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지요. 끊임없는 흔들림 속에 오늘에 이르렀는데요. 현재 제가 추구하는 문학은 삶(세상)의 맥락 속에 놓았을 때 의미를 갖는 한 문장, 또는 소설 한 편에 있습니다.
인생의 스승으로 김윤식 문학평론가님을 꼽으셨습니다. 문예지의 신입기자 시절, 한국문단의 어마어마한 문학평론가와 함께 일하신 경험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윤식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에 입사, 한국문학과 프랑스문학을 담당했습니다. 한국문학에서는 당시 제가 이화대학문학상 시 부분 수상자라는 것이 참작이 되어서 시 쪽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윤식 선생님께서 월평란에 매달 발표된 소설을 모두 읽으시고 문제작들을 선정해서 평을 쓰셨는데, 육개월밖에 안 된 햇병아리 기자인 제게 선생의 원고 심부름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선생이 읽고 있는 것을 따라가느라 매일 밤을 새웠습니다.
임화를 알게 되었고,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헤아려 볼 수 있었고, 김동리의 샤머니즘적 체질과 구경적(究竟的)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1년은 대학 4년 동안 제가 쏟았던 불문학 전공의 총량을 능가했습니다. 그때 제가 만난 선생은 이미 국문학계의 거목이었습니다. 그 어떤 세속적인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인간적인 의지,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소설 읽기, 범접할 수 없는 성격과 아우라. 선생은 한국문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습니다. 괴물이라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선생 곁에서 저 역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읽고 또 읽어야 했기에, 잠은커녕, 밥알을 씹고 삼키는 것조차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보들레르니 랭보니, 플로베르 등으로 꽉 들어차 있던 제 머릿속은 한국 소설들, 매일 매일 발표되는 현장 소설들이 치고 들어와 점령했습니다.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사이 저도 그들처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신춘문예에 응모했습니다. 투고작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 두 곳에서 동시에 뽑혔습니다. 데뷔작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소설가가 된 이후, 선생은 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 하셨습니다. 지난해 겨울 ‘필경(筆耕) 60년 김윤식 저서전’에 찾아뵈었을 때, 선생은 간이 탁자 위에 팸플릿을 펼치고 손수 이런 글을 써주셨습니다. “人不知而不穩(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성내지 않으며…)” .
단편소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문단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박완서 선생님을 생각하며 쓰셨다고 들었는데요.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가 편집자이자 작가로 만난 선생님들 중에 삶과 문학에서 직접적으로 큰 힘을 주신 분이 박완서입니다. 이 작품 속의 P선생은 제 마음 속의 박완서 선생님입니다. 소설가는 사랑의 황홀과 실연의 쓰라림, 그 어떤 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소설로 말하고, 남기고, 전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연인을 잃었을 때, 서로 친분은 없으나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이 부조리하게 생을 박탈당했을 때,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담아 소설을 씁니다. 어느 때는 신랄하게, 또 어느 때에는 냉소적으로, 또 어느 때에는 애틋하게 씌어지는데, 『저녁 식사가 끝난 뒤』는 때로 딸처럼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또 어머니처럼 제게 조언해주시던 박완서 선생님의 부음을 프랑스에서 접하고, 선생님 가시는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을 담아 쓴 소설입니다. 이 세상에 함께 숨을 쉬고 살았으나,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분을 저녁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하며 마음속으로 느껴보는 것, 그런 추모의 형식을 소설을 빌어 써본 것이지요. 좀 따뜻하게 우리의 삶을 추슬러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작가님도 현재 후학 양성에 힘쓰고 계신 만큼, 문예창작을 배우는 문청들에게는 주로 어떤 말씀을 해주시는지 궁금합니다. ‘문학’이 힘을 잃었다고 말하는 시대에,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 말씀해주세요.
소설 쓰기에는 무수한 회의와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인내(지속성)이 필요합니다. 폴 오스터는 쉰 살에 이르러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습작 및 신인 시절을 회상하며 쓴 『빵 굽는 타자기-젊은 날 닥치는 대로 쓰기』라는 자전 에세이 속에, “소설가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것”임을 경험담으로 밝힙니다. 소설가를 꿈꾸는 지망생에게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자각과 의지와 더불어 세상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골방에서의 혼자만의 작업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읽고 탐구해야 하지요.
작가란 어느 한 때 쓰고 마는 사람이 아니고, 글쓰기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것 아니면 그 어떤 삶도 의미(재미)가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자각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 천형(天刑)으로서의 글쓰기, 저주받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작가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요청되는 것이 지속적인 탐구(읽기와 쓰기)와 개성(style)의 창조 못지않게 양식(mora)과 태도(attitude)가 중요합니다. 작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는, 사람 마음 가장 깊숙이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보고, 인간의 의식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업이 소설, 그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휴먼 시대 인공지능이 어휘와 문장 조합 실행력으로 소설을 쓸 수는 있어도 작가 고유의 체취(아우라)를 복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입니다.
"여행은 독서"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독서’하기 좋은 여행지로는 어느 도시를 추천해주실지 궁금합니다. 또, 여행지에 들고 가 독서하기 좋은 책 한권도 소개해주신다면.
보르헤스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 또는 책으로 보았듯이, 저는 ‘도시를 하나의 책’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저를 사로잡는 도시는 파리입니다. 파리는 그 자체로 박물관이자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파리에서는 거리에 나서자마자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고유명(non propre)들을 몇 걸음 못 가서 만나곤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파리는 산책이 가장 느리게 진행되는 곳이고, 그래야만 제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의 산책은 가능한 한 머릿속을 비우고 나서야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팡테옹 언덕의 소르본 대학가 한 귀퉁이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곳에는 빅토르 위고, 파스칼, 몽테뉴 같은 프랑스의 작가와 철학자들의 족적뿐만이 아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니코스 카잔차키스, 가르시아 마르께스,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이방인 시인, 작가들이 스무 살 어름에 유학차, 또는 망명차, 체류한 곳입니다. 또한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몽파르나스 묘지에 들어서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비롯 뒤라스, 베케트, 보들레르, 수잔 손택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도서관 서가를 죽은 자들의 묘지로 비유한 것처럼, 작가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는 이곳이야말로 거대한 야외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파리에 들고 가기 좋은 한 권을 추천한다면, 각자 파리에서 만나고 싶은 시인과 작가들의 책을 선택하면 됩니다. 몽파르나스 묘지 보들레르를 찾아간다면, 『악의 꽃』이나 『파리의 우울』을, 팡테옹 언덕의 발자크 소설 무대를 찾아간다면 『고리오 영감』을, 그리고 파리의 거리들을 탐사하기를 원한다면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나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을 권합니다.
미술애호가, ‘노마드’기질을 타고난 여행가 그리고 요리도 좋아하신다고 알려져 있으십니다. 좋아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열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아요. 제 추측대로, 소설가 함정임은 ‘냉정’보다 ‘열정’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박상순 시인이 저를 묘사한 대로, 저를 처음 만난 3초간은 냉정에 가까운 인간으로 느끼고, 이후에는 열정에 가까운 인간으로 알아간다고 합니다. 하찮거나 소소한 것들, 부서지고 사라지기 쉬운 것들에 대한 애틋함, 연민이 있습니다. 한 번 마음을 준 것(책)과 장소를 계속 찾고 그리워합니다. 예를 들면, 요리를 할 때마다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어울려 이루어내는 색감들, 질감들, 맛들을 좋아합니다. 요리는 그림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여행으로 번집니다. 이들 중 어느 것이 출발점이 되든 서로 넘나들며 순환합니다. 세상살이가 참 신산스러워도 찰나적인 이런 혼융감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이 열정일까요?
올해로 6회를 맞는 <서울국제작가축제>와는 인연이 깊으십니다. 제1회 축제 때 기획위원이자 참가작가로서 참여하시고, 10년 만에 다시 참가하게 되셨는데요. 누구보다 <서울국제작가축제>의 매력을 잘 아는 한 사람으로서, 작가축제가 20년. 30년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한 마디 해주신다면.
2004년부터 2006년 5월까지 1년 반 동안 서울국제작가축제를 준비하는 조직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행사가 아니라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생각이었습니다. 축제는 자유와 열정의 합동 무대입니다. 국내외 작가 행사에 참여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서울국제작가축제를 주관하는 한국문학번역원만큼 전문적이면서 개방적이고, 섬세하면서도 철저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축제의 의미에 충실한 프로그램이라면 ‘서울국제작가축제’는 한국문학의 미래와 함께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9월 마지막 주, 대학로에서 그 막을 연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8월의 어느 날. 설렘으로 잠을 설치는 소풍 전야처럼, 9월의 작가축제가 문득 궁금해진다. 작가축제에서 만나 볼 작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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