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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것 - 연극 <바냐 아저씨>

이윤택 연출과 중견 연극인 창작집단의 만남! 묵직한 울림이 있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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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들은 모두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익숙한 고요함에 젖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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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회전 목마

 

<바냐 아저씨>는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안톤 체홉의 대표작품으로, 체홉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는 4대 희곡 중 하나이다. 러시아의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주인공인 ‘바냐’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간의 갈등을 날카롭고 심도 있게 그려낸다. 체홉은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삶에 대해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인공 바냐는 조카딸인 소냐와 함께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25년간 가장의 역할을 해온 묵묵한 일꾼이다. 죽은 동생의 남편이자 소냐의 아버지인 교수 세례브랴꼬프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친 바냐는, 세례브랴꼬프의 위선적이고 무능력한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늙은 어머니는 세례브랴꼬프를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자신은 그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바냐는 깊은 허무와 고독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세례브랴꼬프가 재혼한 젊은 부인 엘레냐와 함께 바냐의 집으로 찾아오고, 그로 인해 그의 주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게 되면서 바냐의 평범했던 일상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세례브랴꼬프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그를 향한 바냐의 분노와 증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바냐에게 세례브랴꼬프는 허망하게 날려버린,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젊음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절대적 진리라 믿고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쳤으나, 그 진리가 거짓인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과 고독, 허무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바냐는 25년이라는 세월이 안겨 준 절망과 허망함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온몸으로 그 감정을 드러낸다. 울부짖고,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면서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상처를 보여준다.

 

연극 <바냐 아저씨>는 이렇듯 바냐의 내면 심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되,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도 충실하게 그려나간다. 등장인물 또한 모두 입체적이고 개성이 뚜렷하다. 뛰어난 미모로 주변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엘레냐는 어딘가 모르게 백치미가 느껴지고, 욕망에 충실한 의사는 엘레냐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거기에 소냐, 바냐의 어머니, 유모, 몰락한 영주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엮어낸다. 특히 엘레냐와 의사, 소냐, 바냐 네 사람의 뒤엉킨 애정관계는 새로운 극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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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연극인들의 의기투합

 

현재 공연되고 있는 연극 <바냐 아저씨>는 이윤택 연출가가 중견 연극인 창작집단과 함께 협업한 앵콜 작품이다. 연극계의 대표적인 연출가 이윤택과 기주봉, 김지숙, 고창완, 이재희, 이용녀, 이봉규 등 대학로의 내로라 하는 중견 연극인들이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탄탄한 원작과 섬세한 연출, 완벽한 연기의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어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겸비했다.  

 

이윤택 연출가에 의해 재해석 된 <바냐 아저씨>는 블랙 코미디 같은 느낌을 준다. 시종일관 무심하고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다 엉뚱한 곳에서 툭, 하고 내던지는 말들이 허를 찌른다.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지면서 유머러스함은 극대화된다. 특히 바냐를 연기하는 기주봉은 종잡을 수 없는 바냐의 감정을 매끄럽게 표현해낸다. 그의 탄탄한 연기 내공은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한다.

 

<바냐 아저씨>는 세례브랴꼬프를 향해 바냐가 총을 겨누는 절정을 순간 끝으로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바냐와 세례브랴꼬프는 화해를 하고, 바냐는 저택을 떠나는 세례브랴꼬프와 엘레냐를 향해 지난날처럼 그를 후원하겠다고 약속한다. 잠시 머물렀던 이들이 모두 떠나고 전과 다름 없이 조용해진 저택에서 유모는 뜨개질을 하고, 늙은 어머니는 책을 읽는다. 바냐는 조카딸 소냐와 함께 늘 그랬듯이 장부를 정비하고 묵묵히 일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익숙한 고요함에 젖어 든다. 지난 25년의 세월이 그랬던 것처럼, 바냐는 다시 절망과 허무, 고독을 떨쳐내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마 체홉이 말하는 인생도 곧 그런 것이리라.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마주하여 모든 것이 무너졌음에도,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것.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걸어가야만 하는 것. 연극 <바냐 아저씨>는 온 힘을 다해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 이치를 깨달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부를 정리하던 바냐의 마지막 모습은, 무대의 불이 꺼진 뒤에도 강렬하게 머리 속을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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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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