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웃은 안녕하십니까?- 연극 <오백에 삼십>
생계형 코믹 서스펜스
그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로, 좁디 좁고 낡디 낡은 허름한 돼지빌라의 삶을 함께 한다.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삼십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천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도시 서울.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속담처럼, 서울은 수많은 이들이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꿈의 무대이다. 연극 <오백의 삼십>의 배경인 돼지빌라에도 원대한 꿈을 품고 상경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돼지빌라 사람들은 7평짜리 좁은 원룸과 옥탑방에서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삼십을 내며 고단한 서울살이를 해나간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그들 또한 반드시 성공하리라 다짐했건만, 그들의 서울살이는 생각보다 험난하다. 어느 순간 그들에게 서울은 더 이상 꿈의 무대가 아니라 그저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 그 자체일 뿐이다.
연극 <오백에 삼십>의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베트남인 아내 흐엉과 떡볶이 장사를 하며 늘 가난에 시달리는 허덕, 몇 년 째 고시공부만 하며 부모님의 짐이 된 백수 배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밤 업소에서 일하는 미쓰 조 등. 이들은 모두 모자라고, 아프고, 부족함 많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이렇듯 분명히 이들의 현실은 절망적이고 우울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연극은 마냥 어둡고 우울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극을 이끌어 나간다. 극 중 인물들은 시종일관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소란을 피운다. 그들은 모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유쾌하고 해맑으며 순수하다. 물론 그 중간 중간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그들이 많이 지치고 힘든 상태임을 보여주긴 하지만, 인물들은 그 무겁고 우울한 감정에 깊게 매여있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시끄럽고 밝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로, 좁디 좁고 낡디 낡은 허름한 돼지빌라의 삶을 함께 한다.
사건의 등장
<오백의 삼십>은 연극의 중반쯤 들어서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된다. 무식하고 악독한 집주인이 죽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극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형사가 등장해 인물들을 하나하나 취조하고, 그동안의 사건들을 추리하면서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 속에서 돼지빌라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늘 함께 웃고 울고 떠들고 의지했던 그들이지만,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모함한다.
삶의 일부를 공유했던 가까운 이웃이 순식간에 생전 본 적 없던 남이 되었을 때의 허탈함과 씁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가장 멀어지는 그 순간, 그들은 그동안의 팍팍한 서울살이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진짜 절망과 외로움을 느낀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역시도 상처를 입고 나서야 돼지빌라 사람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다시 예전처럼 시끄럽게 교류를 이어나간다. <오백에 삼십>은 바로 앞집, 옆집에 사는 이웃의 얼굴조차 모르고 사는 삭막한 현대인의 삶을 비유적으로 풍자한다. 무관심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를 사는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백에 삼십>은 유쾌하고 센스 있는 대사로 시종일관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특히 멀티 우먼이자 집주인 역할을 맡은 박소영은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후반부를 완전히 장악한다. 중반 이후부터는 거의 박소영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부담 없이 웃고 즐기기에 완벽한 연극이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초반부에서는 별다른 사건 없이 돼지빌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길게 주고받는 인물들의 대사는 다소 지루하고 심심하고 밋밋하다. 초반부의 극을 풍성하게 해주는 사건이 좀 더 필요하다. 집주인 살인사건이 마무리되는 절정의 순간이 맥없이 끝나버리는 점도 아쉽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감동코드가 지나치게 쌩뚱맞게, 지나치게 순식간에 등장해 그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가 힘들다. 전체적인 러닝타임 동안 쉴 새 없이 ‘웃음’을 전달하는 점은 좋았으나 지나치게 ‘웃음’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스토리가 심하게 부실하다. 좀 더 매끄럽고 탄탄하게 스토리를 다듬어야 할 것 같다.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 이웃들의 이야기 <오백의 삼십>은 대학로 풀빛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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