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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모델

『그리다,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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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람이라는 우주를 그린 화가들과 그 화가들의 우주가 된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 그 가운데서도 ‘뮤즈’ 로 불리는,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모델들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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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우주를 그리는 것이다. 사람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정신과 영혼을 지닌 광대한 우주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우주를 화포 위에 펼치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이라는 우주를 그린 화가들과 그 화가들의 우주가 된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 그 가운데서도 ‘뮤즈’로 불리는,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모델들에 대한 책이다.

 

우주의 파노라마가 다채롭듯 화가와 뮤즈 들의 이야기도 다채롭다. 그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 하늘의 별자리를 산책하는 것처럼 삶과 예술, 인연이 이룬 아름다운 신화들을 즐겁게 만나볼 수 있다. 사람을 통해 꽃피어나는 예술적 영감의 가장 빛나는 장면들을 감동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새 책이 아니다. 기존에 출판했던 『화가와 모델』에 내용을 더하고 빼고 새롭게 재구성해 복간한 책이다. 처음 책을 출간할 때 나는 그 집필 배경에 대해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서양미술은 그 어느 미술보다 인간 표현을 중시해왔다. 동양에서문인산수화를 회화의 꽃으로 여겼다면, 서양에서는 역사화와 인물화를 최고의 회화 장르로 생각했다. 인간과 인간의 드라마를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하는 것이 서양미술의 최대 관심사였다. 모델을앞에 두고 그리는 관습은 이런 전통에 힘입어 오랜 세월 굳건히 유지되고 발전해왔다. 화가와 그림 사이에는 모델이라는 결정적으로중요한 창조의 ‘도우미’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감상과 감동의 원천으로서의 그림과 천재로서의화가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게 인정되고 평가되어왔지만, 모델은 그 실제적인 기능과 역할에 비해 미미한 평가와 조명을 받아왔다. 그저 화가와 작품 사이의 어디쯤 존재하는 소품 정도로 여겨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모델은 단순히 그림에 형상을 빌려주는 존재만은 아니다. 물론 그림을 처음 배울 무렵 미술학도들은 모델의 외적인 형상을 따라 그리기에도 급급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화가들은 자신이 그리는 대상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의식과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고, 그 의식과 영혼을 표현한다는 것이 실로 엄청난 도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술 행위라는 것은 그 위대한 창조 활동을 통해 결국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모델을 통해 예술에 접근하는 것 역시 그만큼 살 냄새나는 미술 감상, 곧 인간 읽기의 기회를가지려는 노력이라 하겠다. 화가와 모델에 관해 쓴 이 책이 예술이 지닌 그런 ‘인간성’을 드러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 기대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미술 감상은 무엇보다 인간 읽기다.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미술작품을 본다. 인간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우주를 이해한 것 아니겠는가.

 

조형 양식을 구별해 보고 사조를 따지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자신의 삶과 투쟁을 통찰해볼 수 없다면 그 작품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 냄새라고는 전혀 없는, 절대적인 예술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작품과 어우러진 인간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그가 그림의주인공이든 배경에 머무는 주변 인물이든 심지어 작품을 제작한 작가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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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아무런 인간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 듯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미술가나 제작 과정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우리는 보다 확대된 연상과 통찰로 인해, 작품 속에 내재된 보다 풍부한 의미를 캘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인간 이해를 통한 미술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려는 책이다. 나 역시 자료를 찾고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만 그 초점을 뮤즈로서의 모델들에 맞췄다. 이전 책에는 화가에게 중요한 모델이기는 하지만, 뮤즈가 아닌, 혹은 뮤즈라고 부르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장도 여럿 있었다. 이 책에서는 그 부분을 과감히 생략했다. 대신 뮤즈라고 불릴 수 있는 모델들에게만 집중했고 그 내용을 더 보충했다. 그렇게 이 책은 새 책으로 거듭났다.

 

새로이 책을 복간하려니 20세기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이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그림은 그 나름의 삶이 있다”라고 말했다. 화가가 어떻게 의도하고 표현하든 그림은 그림 자체의 숙명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말로 “나는 한 번도 애초에 내가 구상한 대로 그림을 완성해본 적이 없다”라던 피카소의 말도 떠오른다. 미술가들이 나름의 영감을 받아 작품을 시작하지만, 그 끝은 항상 계획한 대로 마무리 되지 않는다. 의식으로 모든 것을 통제해서 완성한 사물은 기능물이지 예술 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창조적 의식이 생의 변천과 같은 굴곡진 변화를 겪으며 하나의 운명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감상되는 과정도 삶의 드라마 같은 변화를 겪는다. 카라바조나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오랫동안 잊혔다가 재발견되어 오늘날 극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 영광의 자리에 오른 작품이 내일 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가 하면 어제까지도 생소했던 작품이 오늘 누구나 알아야 할 작품으로 똬리를 틀곤 한다.


책도 그림같이 그 나름의 삶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처럼 한 번 절판되었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빛을 보게 될 때 특히 그런 느낌을 받는다. 저자인 나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길로 이 책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온 것이다. 『화가와 모델』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03년의 일이다. 예담 출판사에서 책 세상에 상재했고 관심 있는 독자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 소임을다한 책은 2014년에 절판되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포털 사이트 네이버로부터 연재 의뢰를 받게 되었고, 원래의 책 원고에 새롭게 내용을 보강하고 다수의 도판을 추가하여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싣게 되었다. 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애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이에 고무되어 나는 결국 네이버캐스트 연재물을 토대로 책을 새로이 출간하기로 마음먹었고, 고맙게도 아트북스에서 기꺼이 그 부담을 져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그 과정에서 이전 책에 있던 장들이 여럿 빠졌다. 그 대신 ‘화가와 뮤즈’라는, 보다 성격이 명확한 카테고리로 보듬고 윤기를 더했다. 그렇게 이 책은 다시 책 세상에 나왔다. 모쪼록 이 책이 개척하는 새로운 운명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부디 미술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호감을 조금이라도 더 키울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 책이 새로운 살과 뼈로 거듭나도록 기회를 제공해준 네이버캐스트팀의 함성민 부장, 재출간 제의를 흔쾌히 받아준 아트북스의 손희경 편집장,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하여 아름다운 책으로 완성해준 임윤정 편집자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동안 아트북스에서 발간한 내 책을 저자인 나보다 더 정성 들여 만들어준 손희경 편집장이 이번에는 직접 손을 보지 못했다. 워낙 열심히 일을 해온 탓인지 건강에 무리가 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빨리 쾌차하기만을 바란다.

 

2015. 10. 10
바우재에서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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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다, 너를 이주헌 저 | 아트북스
세계를 감동시키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 가운데는 ‘사람’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을 다룬 주제가 많다. 이러한 명작이 탄생하는 데는 붓을 쥔 화가의 천재성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화가가 붓을 쥐고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수놓을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매개체’가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모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다, 너를』은 바로 그 화가가 사랑한 모델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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