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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해도 좋아! 뮤지컬 <고래고래>의 배우 김재범
뮤지컬 <고래고래>
제 안에 여러 가지 인물이 있는 것 같아요.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호빈이처럼 까불기도 하고, 불편한 자리에서는 <올드 위키드 송>의 스티븐처럼 굴기도 하고. 다중인격은 아니고요(웃음)
인터뷰를 하다 보면 유독 무대 위 모습과 다른 배우들이 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대답은 단답형이죠. 공식적인 자리이나 사적인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에게는 무척이나 답답하면서도 서운한 순간인데요. 마치 별다른 반응 없는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는 심정이랄까요? 하긴, 배우의 이런저런 모습이 궁금한 기자야 인터뷰가 신나겠지만, 배우에게는 낯선 사람을 만나 실수 없이 대화를 해야 하는 불편한 자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인터뷰 때 유난히 힘들었던 배우가 무대 위에서 돌변하면, 특히 코믹한 모습을 능청스럽게 소화해내면 ‘과연 저것은 100% 연기일까?’ 궁금해집니다. 노래나 춤처럼 코믹함도 연습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유전자에 내재된 타고난 게 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잠시 잊고 지냈던 이 배우를 또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뮤지컬 <고래고래>에서 ‘찌질’과 ‘허세’의 극치, 백호빈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김재범 씨 말입니다.
“제 안에 여러 가지 인물이 있는 것 같아요.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호빈이처럼 까불기도 하고, 불편한 자리에서는 <올드 위키드 송>의 스티븐처럼 굴기도 하고. 다중인격은 아니고요(웃음). 인터뷰 초반에는 ‘네, 아니요.’로만 말했는데 싫어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편해졌죠.”
그러고 보니 기자도 인터뷰로 배우를 만날 때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편이지만, 일이 끝나면 그저 바라만 보는 소심한 관객으로 돌아가는군요. 사람에게는 모두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현재 두 작품에 함께 출연하고 있는 김재범 씨. <올드 위키드 송>의 까칠한 천재 피아니스트 스티븐은 물론이고, <고래고래>에서 백호빈 같은 모습도 꽤 어울리네요.
“캐릭터가 찌질하고, 말도 많고, 제일 못났잖아요. 아무래도 백호빈은 편해요, 애드리브를 막 해도 되고. 스티븐은 코믹한 부분이 있더라도 더 진지하게 하려고 하고요. 전혀 다른 두 인물로 번갈아 무대에 서는 게 힘들지는 않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좀 처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12월에 공연될 <오케피>도 준비해야 하죠? 게다가 작품들이 모두 연기 외에 배울 것들이 많습니다.
“네, 모두 악기를 다루는 작품이라 각각 드럼, 피아노, 트럼펫을 배워야 하죠. <고래고래>는 영화로도 촬영했는데, 그때는 호빈이가 아니라 병태를 연기해서 베이스도 배웠어요. 그런데 악기라는 게 조금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고래고래>에서는 실제 밴드에서 드럼 연주하는 분과 동작이라도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자잘한 기술은 할 수가 없죠. 특히 밴드에 드러머가 두 분인데, 듣다 보니 미묘하게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 분한테 맞추고 있어요(웃음).”
두세 개 작품을 한 번에 하려면 무척 힘들 텐데,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평소에 많이 누워 있어요. 운동을 하면 힘이 다 빠져서 공연을 못해요. 안 움직이고, 말 안 하고, 무대에서 쏟아내기 위해서 가만히 누워서 에너지를 모으고 있어요(웃음).”
뮤지컬 <고래고래>는 목포에서 고등학교 시절 밴드로 활동했던 영민과 호빈, 민우, 병태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10년을 보낸 뒤 다시 밴드로 뭉쳐 목포에서 자라섬까지 도보음악여행에 나서는 모습을 인디밴드 몽니의 노래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영화 <마차 타고 고래고래>로도 제작됐는데, 영화에도 참여하셨죠?
“학교 때 단편 찍은 거 외에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죠. 초반에는 적응이 잘 안 됐어요. 저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연기하는 편인데, 영화에서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더라고요. ‘아까 했던 동작 기억하시죠? 똑같이 다시 갑시다!’ ‘앗, 난 기억이 안 나는데(웃음)?’ 저는 그냥 느낌대로 했는데 동작을 똑같이 하라니까 기계가 된 느낌도 들고. 그런데 하다 보니까 적응도 되고 재미도 있고, 내용도 심각한 게 아니라서 두 달 동안 즐겁게 촬영했어요.”
그런데 출발지가 목포잖아요. 사투리는 따로 배우지 않은 거죠? 제가 목포여고를 졸업했는데, 배우 분들의 사투리 연기가 좀 어색하더라고요(웃음).
“영화 준비하면서 목포 분한테 배웠어요! 그런데 정말 웃긴 게 사투리는 자기가 안 가르치면 다 이상하다고 해요. ‘그거 아니다, 잘못 배웠다!’ 거의 100%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재밌어요, 사투리에 대한 어떤 자부심이 있나 봐요(웃음). 심지어 어떤 배우는 전라도 사람인데, 사람들이 사투리 이상하대요. 서울말도 다들 억양이 다르잖아요. 거기다 배우마다 자기 식으로 소화하니까 우리끼리도 다 달라지더라고요.”
연주나 연기를 하면서 여행하는 건 모든 예술가들이 한 번쯤은 꿈꿔보지 않을까 싶은데, 김재범 씨는 움직이는 걸 싫어하잖아요(웃음).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나요?
“예전 같으면 단번에 하지 않겠다고 했을 거예요. 돌아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런데 <유럽 블로그>라는 작품을 하면서 좀 달라졌어요. 여행을 소재로 한 음악극인데, 그 작품을 하려면 공연 중간에 나오는 영상 때문에 직접 유럽에 가서 촬영을 해야 해요. 저는 유럽도 별로 가기 싫었거든요. 2주 동안 친한 애들이랑 가는 건데도. 그런데 가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덕분에 어딘가에 가는 걸 예전만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최근 2년여 간 김수로 씨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하셨군요.
“네, 항상 먼저 물어봐 주세요. 실력보다는 어떤 됨됨이를 좋게 보신 것 같고(웃음), 작품들도 재밌고요.”
다양한 작품을 하셨지만, 의외로 작품 색깔 면에서는 좀 한정된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대극장 스테디셀러 작품에서도 뵙고 싶은데요.
“대극장 무대를 짊어지고 가기에는 제 어깨가 너무 좁습니다. 중소극장 스테디셀러는 다 했고요. 사실 요즘 올라오는 작품들은 성소수자 얘기나 암울한 이야기가 주고, 로맨틱 코미디는 거의 사라졌죠. 왜 이런 작품만 만들어지느냐고 물으신다면, 많이 보시거든요. 유행이라는 거겠죠. 작품을 하는 건 좋은데, 이미지를 그쪽으로 몰고 가는 건 좀 안타깝죠. (최)재웅이 같은 애가 동성애 연기를 하면 ‘저 사람이 게이일 리는 없어!’ 그러는데, 저는 외모 때문인지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배우로서 한쪽 이미지로만 가는 게 안타까워서 남자다운 역할도 하려는데, 그런 작품은 잘 안 들어옵니다(웃음).”
지금까지 맡아온 인물은 대부분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이잖아요.
“그렇죠. 서른일곱 살인 역할이 별로 없죠. 제 나이가 되면 대부분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나이든 역할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예요. 활동을 굉장히 많이 하는 나이인데, 작품에서는 좀 애매한 나이라서.”
지금처럼 작품이 많을 때는 현실의 김재범 씨로 생활하는 시간이 짧을 텐데, 작품 밖의 스스로를 보면 어떤가요?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아니, 뒤로 갔으면 좋겠어요. 아쉽거든요. 열심히 해오기는 했지만 아쉬운 게 있어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기도 했고.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어느새 서른일곱 살이고. 저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할 수 없을 때도 있고요. 사실 나이가 들수록 역할은 한정되니까. 몸도 좀 힘들기도 하고. <고래고래> 뛰고 나면 힘들어요(웃음).”
말씀은 줄곧 겸손하게 하셨지만 차곡차곡 꼼꼼하게 작품들을 해오셨잖아요. 2007년 이후 쉬지 않고 무대에 섰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런 상상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만약 한 달간의 아무 걱정 없는, 산뜻한 휴가가 생긴다면 뭘 하고 싶나요?
“아무도 없는 바닷가 별장에 가서, 별장이 없으니까 펜션에 가서. 대신 통유리로 바다가 보이고 창문을 열면 바람이 불어오는 럭셔리한 펜션이어야 해요(웃음). 자고 싶으면 자고, 걷고 싶으면 걷고, 만화책 보고 싶으면 보고, 맥주 한 잔 하면서 그렇게 편안하게 있고 싶네요. 요즘 그러고 싶을 때가 있긴 해요.”
토요일 정오라서 그런 걸까요? 아직은 거리마저도 잠이 덜 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배우도 기자도 홍보 담당자도 조금은 나른한 느낌으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잠시 뒤 <올드 위키드 송>의 스티븐으로 무대에 오를 김재범 씨와 어젯밤 공연한 <고래고래>의 백호빈에 대해 얘기하고 있자니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김재범을 한꺼번에 만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확실히 예전보다는 인터뷰하는 모습이 편안해졌고, ‘김재범식’ 유머도 보여주고, 되레 기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요.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백호빈보다 더한 게 아닐까요(웃음)? 김재범 씨의 또 다른 모습이 궁금한 관객들은 뮤지컬 <고래고래>에서 그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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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