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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가 되는 소설들

‘할머니’가 평생 되지 않을 여자들이 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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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와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읽다 보면 강풀 작가처럼 그저 ‘내가 ‘사랑에 빠진 듯한’ 기분에 든다. 그만큼 책들은 사랑 그 날것의 그리움과 괴로움, 열정과 체념으로 가득 차서 읽는 것만으로도 열병을 앓는 것 같은 대리체험이 가능하다.

요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냐면, 세 번째 소설의 초고를 수정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은 ‘오, 신이여, 진정 내가 이 글을 썼단 말씀입니까’하며 자기 글에 새삼 반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 경우 초고의 민낯을 다시 처음부터 차례차례 짚어가면서 수정할 때의 심정은 대개가 ‘난 쓰레기야’이다. 어쩌다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싸놓고(써놓고가 아니라 싸놓고다) 한때 좋~다고 신나했던가. 나는 대체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방향성을 잃기도 한다. 결국 그 답은 나에게서 나와야 하겠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감정의 결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외부의 도움을 받는 걸로 치면 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사실 소설쓰기처럼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책들,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이 쉽지가 않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기도 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특정 소설들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내 소설들을 읽은 웹툰작가 강풀이 “누나(네, 제가 누납니다), 누나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꼭 마치 내가 지금 연애하고 있는 것 같아’라는 말로 나를 기쁘게 한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지금처럼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쓸 때 나는 사랑에 관한 소설들을 필요로 한다. 그 소설들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고 농후해서 내 감정이 퍽퍽하게 건조해지는 것을 막아줘야 한다. 현실에서의 나? 지독한 사랑앓이는커녕 녹색어머니회의 당번 채우기나 딸아이의 사교육 문제나 ‘내일은 뭐 해먹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래가지고자 가슴이 시큰시큰하게 타들어가는 격정사랑소설을 과연 쓸 수나 있을까.
 
그럴 때는 잠시라도 다음 두 작가의 책을 어느 페이지에서건 밤에 쉴 때 훑어본다. 하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잡동사니』이고 또 하나는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녀들은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연애를 해온 여자들 같다. 일본의 여성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인생을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눈다면 남자와 사랑하기/글쓰기/긴 목욕하기라고 할 만큼 에쿠니 가오리는 남녀간의 아릿아릿한 감정의 묘사가 일품이다. 아니 에르노는 사랑에 있어서 ‘끝까지 가는’ 여자다. 간보기 따위는 없고 한 번 사랑에 빠지면 흠뻑 빠져 집착까지 서슴지 않는다(실제 『집착』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아니 에르노 본인도 자신은 ‘자전적 이야기’밖에 쓰지 않는다고 자인하면서 자신의 정사를 글로 드러내는데 요만큼의 주저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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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밤에 독서를 하는 공간


사랑이나 감정에 관한 한, 나는 이 두 여성작가만큼 정념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 작가를 보지 못했다. 알랭 드 보통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등 남자 작가들의 연애소설도 읽지만 여자 작가들에 비해 담백하고 분석적인 편이다 (가령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 : 한 남자』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에쿠니 가오리와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읽다 보면 강풀 작가처럼 그저 ‘내가 ‘사랑에 빠진 듯한’ 기분에 든다. 그만큼 책들은 사랑 그 날것의 그리움과 괴로움, 열정과 체념으로 가득 차서 읽는 것만으로도 열병을 앓는 것 같은 대리체험이 가능하다.
 
낮에는 초고를 수정하면서 내가 쓴 글이 한심하게 느껴지면 그나마 여태 쓴 원고 중에 봐줄만한 구석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나를 토닥여보지만, 하루의 원고량을 어떻게든 마무리지은 후 밤이 되면 다시 한 번 마음의 결을 다지기 위해 거실 소파에 누워 그 ‘찐한’ 여자들의 사랑이야기를 들쳐본다. 아무래도 이 여자들은 아무래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연애감정을 느끼며 끝끝내 살아내야 할 ‘팔자 센’ 여자들 같다. 아니 ‘할머니’가 평생 되지 않을 여자들인 것이다. 

 

 

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저 | 소담출판사 | 원제 : がらくた

해바라기처럼 남편만을 바라보며 사는 마흔다섯 살 슈코, 세 살 때 미국으로 떠나 갓 일본에 돌아온 미우미. 에쿠니 가오리의 최신 장편소설 『잡동사니』는 이 두 여자, 즉 40대 여성과 10대 소녀의 상반된 감성을 옴니버스로 이어진 본격 연애소설이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와의 정사, 남편의 여자 친구, 미성년자와의 관계 등, 사랑과 집착, 그리고 도덕성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며 '에쿠니 가오리 식'의 격정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저/최정수 역 | 문학동네 | 원제 : Passion simple

프랑스의 문제적 작가 아니 에르노가 1991년 발표한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다루며 그 서술의 사실성과 선정성 탓에 출간 당시 평단과 독자층에 큰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다.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철저하게 객관화된 시선으로 ‘나’라는 작가 개인의 열정이 아닌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열정을 분석한 반(反)감정소설로, “이별과 외로움이라는 무익한 수난”을 겪은 모든 사람들의 속내를 대변한다. 2001년 국내에 처음 소개되어 꾸준히 사랑받아온 작품으로, 이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새롭게 속하며 이재룡 문학평론가이자 숭실대 불문과 교수의 해설이 더해져 르노도상,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등을 수상하고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아니 에르노만의 독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도 더할 수 있게 되었다.

 

 

 


 

[관련 기사]

- 임경선 “사랑은 관대하게 일은 성실하게” 〈Across the universe〉
- 완전한 개인의 탄생을 환영하며 : 임경선 ‘나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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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경선 (소설가)

『태도에 관하여』,『나의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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