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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이 종이인 게 나니가 와루이?!

사랑은 종이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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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안 하는 솔로는 이상하지만, 세상의 질서가 허용하지 않는 대상과의 연애는 더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애가 아니거나, 연애일 수 없으며, 연애여서는 안 된다.

“어느날 불쑥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적절한 연애의 조건과 범위는 누가 정했으며, 왜 나는 내가 동의한 적 없는 그 기준에 따르도록 강요되는가? 그러하면 접촉 가능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월’한 감정인가?”

 

역사에 기록될 만한 드립을 인용하면, ‘뇌색남(뇌까지 색종이인 남자)’의 귀환이었다. 지난주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는 ‘김영만 아저씨’가 출연하여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김영만 아저씨’는 1988년부터 KBS 어린이 프로그램 <TV 유치원 하나 둘 셋>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종이접기를 가르친 종이접기의 달인이다. 아래위로 몇 살까지 그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치원에 김영만 아저씨가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지방의 소도시에 살던 유치원생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TV에 나온 사람’을 봤던 날, 어김없이 “아저씨는 미리 준비해왔어요.” 하고 완성품을 꺼내는 영또(영만 아저씨가 또!)에 당해서 눈물을 흘렸다. 김영만 아저씨의 방송 내내 채팅창은 추억에 젖은 20~30대들이 종이접기를 하던 손으로 빠르게 두들겨대는 대화로 가득했는데, 그중 기억나는 것은 바로…“남자친구를 만들어달라”, “여자친구를 접어달라”였다. 아무리 외로워도, 그런 요청은 넣어두자. 어허, 넣어두라니까. 김영만 아저씨는 무엇이든 만드는 ‘금손’이지만, 함부로 인체 연성을 시도하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것을 우리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통해서 배우지 않았는가! (모른다면 아라카와 히로무의 <강철의 연금술사>를 보고 오시라) 종이 남친, 종이 여친을 굳이 접어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들은 종이 위에 얌전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하며, 내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종이 남친 [명사]


2차원에 있는 남자 캐릭터에게 사랑을 느껴 그를 실존 인물처럼 사랑하는 경우 쓰인다. ‘종이로 된 남자친구’, ‘종이 속에 있는 남자친구’ 등의 중의적 의미가 있다. 여성 캐릭터는 ‘종이 여친’으로 응용하면 된다. 

유사어 : 덕후는 아니고요. 아닌데요. 아니라니까 참.

 

얼마 전 언니와 함께 식당에 갔다. 식당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로 벽을 잔뜩 꾸며놓았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하나 이건 무슨 만화고, 이건 언제 나온 무엇이고, 하고 설명을 하는 나를 보고 언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도 넌 10덕후는 아니니까. 내가 참을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나 10덕훈데?” 그 순간 혈육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만화 주인공이랑…사귀고 싶어?” 아니 이게 무슨 참치 김밥에 마요네즈 뿌릴 거냐는 답정너 질문이야.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 말을 듣고 언니가 너무 놀라길래 그다음 대사는 그냥 꿀꺽 삼켰다. “아, 주인공은 아니고. 나는 주인공의 라이벌 킬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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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종이인간 성애자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P-sexual(paper sexual)이라는 정식 학명을 좀 붙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종이 인간이 좋았다. 첫사랑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손으로 경찰의 지갑도 털어버리는 소매치기 출신이자 16년째 열아홉 살인, 다리가 예쁜 천재 기타리스트였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들고 짤짤 흔든 대한민국 만화계 메가 히트작 「오디션」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첫사랑 설명에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그래요 여러분, 제 첫사랑은 바로 국철입니다. 「오디션」은 1997년 <윙크>에 연재되기 시작한 천재 소년들의 음악 토너먼트 오디션 도전기로, 총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등학교 때 별생각 없이 집어든 그 만화책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온 세상의 고독은 혼자 다 짊어진 듯한 포스로 기타를 뚱기는 츤데레 국철을 본 순간 귀에서 울려 퍼진 건 분명 샹투스. 이건 운명이야! 유치원에서 제일 잘생긴 애를 봐도 안 뛰던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하기 시작했다. 그건 말하자면, 한 인간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모든 P 섹슈얼에게는 그렇게 차원을 넘나드는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통계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종이 인간을 사랑하는 취향은 타고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 번도 종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머글은 있지만 한 번만 종이 인간을 사랑한 덕후는 없다. P 섹슈얼은 첫사랑의 각성 이후로 무수히 최애캐(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갈아타는 운명에 처하며, 높은 확률로 고난에 처한다. 금단의 사랑을 단죄하는 세상의 발길질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현존하지도 않는 가상의 캐릭터에게 사랑을 느끼느냐는 비난이 P 섹슈얼에게 쏟아진다. 미디어에서 P 섹슈얼을 다루는 시선은 흡사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하다. 방송은 그 사랑이 얼마나 기형적이며, 허황한 존재에 빠진 이들이 소위 “정상”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관음하는데 집중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종이 인간 취향을 감춰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첫사랑은 영원한 스테디셀러이자 마르지 않는 샘인지라, 서먹서먹하다가 좀 친해졌다 싶은 친구들끼리도 종종 첫사랑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다. 내 첫사랑은 종이 인간이라고, 너희가 옆집 오빠/언니/누나/형/선배/선생님 기타 등등에 애태우고 두근두근하는 만큼! 나도! 종이 속의 철이만 보면! 가슴이 막 뛰고 철이가 기타 치면 마리오네뜨처럼 일어나서 춤춰야 될 것 같고 철이가 싸늘한 말투와 눈빛으로 꺼지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세상의 저 끝까지 꺼져야 될 것 같고 그렇다고!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끝내 말하지 못했다. 연애를 안 하는 솔로는 이상하지만, 세상의 질서가 허용하지 않는 대상과의 연애는 더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애가 아니거나, 연애일 수 없으며, 연애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상적인 연애와 비정상적인 연애를 설정하고 구별하며, 끊임없이 비정상을 ‘교정’하여 정상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퀴어와도 같은 맥락에 놓일 수 있다. P 섹슈얼이 부딪히는 장벽은 연애의 대상이 ‘현존’해야 한다는 것, 즉 접촉이 가능한 범위에 있으며 생활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규준이다. 그런데…어느 날 불쑥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적절한 연애의 조건과 범위는 누가 정했으며, 왜 나는 내가 동의한 적 없는 그 기준에 따르도록 강요되는가? 그러하면 접촉 가능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월’한 감정인가?


가수 타블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길에서 마주치거나 한 번 본 것만으로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느냐고. 사랑은 평등한 거라고. P 섹슈얼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다른 차원의 닿을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한 선구자, 지귀를 잠시 소환해보겠다. 우리의 설화 속 조상님이시다. 평범한 서민이었던 지귀는 선덕여왕을 몹시 사랑했는데,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였다. 어느 날 절에 방문한 선덕 여왕은 낮잠을 자는 지귀를 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갸륵히 여겨, 가슴에 자신이 차고 있던 팔찌를 얹어 주었다. 그렇다. 계를 탄 것이다. 잠에서 깬 지귀는 그 팔찌를 보고 그만 좋아서 불타 죽었다고 한다. 크. 나 같아도 불타 죽을 듯. 여러분 막 지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요? 내 최애가 종이에서 나와서 내 가슴에 자기의 분신 같은 밀짚모자라든가 농구공이라든가 자전거 폐달 하나 얹어주고 가면, P 섹슈얼은 너무 좋고 벅차서 불타는 게 뭐람, 잿더미 속에서 환생도 하겠다.


주변의 탄압만 아니라면 P 섹슈얼의 연애는 행복하고 충만하다. 우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으므로 나의 격렬한 사랑은 그의 털끝 하나 해칠 수 없고(데이트 폭력?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우적우적) 그가 아무리 칼 세 개를 한 번에 쓰는 전투력 최강의 괴물이라고 해도, 내가 원하기만 하면 바로 안전이별이 가능하다. 물론 작가가 뜬금없이 내 애인의 팔이나 눈을 날려먹거나 죽여 버리는 통수가 있지만(에이스! 돌아와!), 잘 골라잡기만 하면 오래오래 안정적인 연애가 가능하다. 나의 카톡을 씹거나 거짓말하거나 기념일을 까먹었다고 속상해할 필요도 없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냥 그대로 거기 있어줘’ 뿐이기 때문이다. 기념일은 이쪽 세계에 있는 내가 챙길게, 그러니까 너는 그냥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던 거마저 하렴! 크윽. 이거야말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온전히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붓고,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억지로 빼앗으려 하지 않는, 가장 윤리적인 사랑 아니냐며. 게다가 한 번에 여러 명을 만나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하하하!


물론 종이 인간과의 연애에는 뱀파이어를 사랑하는 것에 버금가는 슬픔이 따른다. 바로 나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 처음 좋아할 땐 분명히 오빠였는데, 이제는 누나를 넘어서 이…이모…는 안된다 이놈들아. 아청법 삐용삐용해서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여보라고 부를 테다(!) P 섹슈얼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최애캐 대신 나이를 먹는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났으니, 매해 나이 차이는 벌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차원을 뛰어넘은 P 섹슈얼의 불같은 사랑은 그 어떤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적과 나이 차, 종(種)의 차이마저 횡단하는 운명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이 사랑을 멸시하고 폄하할 권리는 당신에게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외친다. 남친이 종이인 게, 나니가 와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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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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