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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뭐냐건 그저 웃지요
취미 수준이 아닌 덕후
덕질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한없이 내가 쓰레기 같은 새벽이라도, <미생>의 조연이라도 된 날처럼 여기저기 깨지고 치인 날이라도,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단번에 나를 건져 올리는 것이 가능한 구원. 그것이 덕질이다
“취미가 많아서 그래.” 연애는 도대체 무엇이며, 왜 우리는 이것에 열광하며 몸을 던져야 하는가, 하지 않으면 어째서 불쌍하고 열등한 ‘쏠로’가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머리가 꽉 차 있던 차에 누군가는 필자의 비연애 상태에 대해서 그런 진단을 내렸다. 취미가 많다는, 혹은 쌔비파고 있는 어떤 취미가 있다는 사실은 자주 솔로들의 연애를 불가능하게 하는 용의자 선상에 오른다. 취미 없는 사람은 매력 없다고 하면서도, 오늘날 취미는 자연발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문턱 너머의 한 차원 높은 미적 경험으로 추앙 받으면서도, 그러한 취미로 인해 발생하는 쾌감과 희열을 ‘지나치게’ 누리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좀 더 까놓고 말하면 취미 수준이 아니라 ‘덕후’라고 불릴 만한 찐득함과 꾸준함을 갖추었을 때의 이야기다. “쟤는 저걸 관둬야 애인이 생겨.”
어느 정도 익숙한 개념이 되어버렸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덕후’는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가 수입되면서 한국어 발음으로 변형한 단어이다. 서브 컬처에서 뿌리 내린 개념이다보니 초창기에는 게임, 애니메이션, 아이돌, 인형, 코스프레 등에 탐닉하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위 문화에 대한 경멸과 ‘현실과 동떨어진’ 취미에 몰두하는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는 뜻이다.
덕후가 스스로를 덕후라 칭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유명인사들이 속속 덕밍아웃(내가 바로 이 구역 덕후다!)을 하는 시대지만, 덕후에 대한 차가운 시선 때문에 여전히 많은 덕후들은 이 오빠가 내 오빠다, 이 미미쨩이 내 미미쨩이다! 말을 못한다. 오죽하면 덕후가 아닌 척 한다는 의미의 ‘일반인 코스프레’가 천 만 덕후들의 생존 전략이 되었겠는가. 컬러풀 필름에서 찍은 시트콤 <일반인 코스프레>는 이러한 덕후가 ‘정상적이고 무난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성공적인 연애 관계에 진입하기 위해 혼신의 일코를 하는 내용으로 수많은 덕후들의 가슴을 울린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샤월이라면 그거 꼭 보세요. 배 쨉니다.
취미와 덕질을 구분하는 기준은, 순전히 개인적이지만 간단하다. “~하느라 공부가(일이) 안돼.” 취미가 인생을 방해한다면 취미를 즐기는 민간인이다. “공부(일)하느라 ~을 못하겠어.” 인생이 취미를 방해한다면 당신의 취미는 덕질의 영역으로 업그레이드되며, 당신은 어엿한 덕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연애인구가 희화화될 때 덕후는 가장 먼저 앞으로 끌려나와 돌을 맞고 덕질은 연애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지목된다. 덕후의 외모에 대한 폭력적인 편견은 잠시 접어두고, 덕후의 정체성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혐의는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덕후는 그 중에서 덕질이 우선순위다. 그냥 우선순위도 아니고 최우선순위다. 한정판 게임이 나오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달려가고, 품에 안고 있는 인형의 기분이 우울한 것 같으면 서둘러 외출에서 돌아오고,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오빠가 출국한다고 하면 시간이 몇시든 돌아오는 차는 알아보지도 않고 카메라를 메고 뛰어간다. 비생산적인 일에 저렇게 빠져 있는 것만도 충분히 이상한데, 심지어 덕후들은 자기들끼리의 탄탄한 커뮤니티까지 형성하고 있다. 그 세계의 문법과 양식에 익숙해지면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과의 소통에도 차질이 생기고, 결국 자기를 가꾸는 데 소홀해지며, 환상 속의 대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현실의 이성에 대한 괴리감을 크게 느껴…어우 야. 이럴 때 쓰라고 조앤 K.롤링이 만든 대사가 있지. “입닥쳐, 말포이.”
덕후 중에도 연애인구는 있고, 예쁜 사람도 많아요, 하고 쉴드를 펼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덕질 자체를 ‘연애’로 표상되는 ‘정상적인 삶’에 대치되는 것으로 보는 편견을 다른 방식으로 강화하며, 연애하지 않는 상태의 덕후를 ‘덕질 하면서 연애도 하는’ 덕후보다 낮은 계급으로 배치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취미는 한 사람의 주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명백하게 해주는 선택기준이다. 덕후가 좋아하는 장르가 사회적으로 핍박 받는 장르일수록 덕후 안에서도 계급이 촘촘하게 경계 진다. 와인 덕후, 클래식 덕후와 같은 소위 ‘고급진’ 취미의 덕후들은 빵빵한 문화 자본을 바탕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민간인을 굽어보는 권력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도대체 왜, ‘나의 삶’을 그토록 풍요롭게 만드는 덕질이 연애보다 열등하게 취급 받고 때때로 연애가 나의 덕질을 (단어 그대로) 탄압 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덕질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한없이 내가 쓰레기 같은 새벽이라도, <미생>의 조연이라도 된 날처럼 여기저기 깨지고 치인 날이라도,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단번에 나를 건져 올리는 것이 가능한 구원. 그것이 덕질이다. 보는 것만으로 흐물흐물 녹으며 피로가 싹 사라지고, 자 다시 널 위해 소처럼 돈을 벌어볼까! 하고 생기발랄해지는 그것은 여러분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덕질…큭…☆ 주변에 혹시 가진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행복지수가 높아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혼신의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덕후다! 하지만 각종 자기계발서며 멘토들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그렇게 행복을 찾으라고 외치는 판에, 덕후의 행복은 언제나 평가절하 된다. 부질없다는 이유로, 실체가 없다는 이유로, 다 판타지라는 이유로, 덕질을 안 해본 머글(=민간인)들은 쉽게 혀를 끌끌 찬다.
그들에게 덕후는 계몽이 필요한 우매한 민중이다. 하지만 오또카지? 덕후들은 자신이 판타지를 좇고 있다는 것을 아주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을. 올해 가장 핫했던 모 아이돌의 열애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사건 바깥의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팬덤과 아이돌이 유사 연애 관계이며, 아이돌의 연애가 그러한 관계를 위반했기 때문에 팬덤이 분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좀만 더 파고들어 가면, 그 배신감의 결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팬덤과 아이돌은 거의 부모-자식의 관계에 가까운 아가페적 사랑의 양상을 띠고 있으며, 많은 덕후들이 자신의 아이돌과 사귀는 것을 절대 꿈꾸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덕질’을 통해 구축한 자신의 세계와 행복이 있다. 이것이 깨졌을 때의 좌절감은, 꿈의 직장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거나 들어갔음에도 이상과는 다른 현실에 부딪혔을 때 느끼는 환멸과 다를 바가 없다. 도대체 손에 완전히 쥘 수 있는 실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며, 그것을 좇으면 ‘더’ 행복할까? 굳이 행복에 계급을 매겨서 줄을 세워야 직성이 풀린다면, 덕후들은 그냥 최하위 등급 도장이 찍힌 채 저 뒤에서 제일 행복하게 놀고 있을게영.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취미판단의 유일한 근거를 판단자의 주관적 감정으로 들었다. 이 취미판단은 어떠한 대상도 지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느끼는 일종의 ‘생명감정’이다. 이 취미판단에서 쾌의 감정이 발생할 때 중요한 것이 대상에 대한 의도가 없이 발생하는 무관심적 만족감이다. 이 무관심이란 말은, 츤데레가 아니라, 실용적 관심이나 의무감, 직접적 감응을 전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전국의 덕후들, 들리나요? 우리는 칸트적 의미의 취미판단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었네요.
내 덕질의 대상이, ‘내 새끼’가 내 입에 밥 한 숟갈 넣어주지 못해도 툭하면 통장을 털어가고 속을 새카맣게 태워도 덕후는 그저 걔가 나를 강렬하게 쳤던 그 아름다운 모습 자체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니까. 칸트미학은 ‘나’의 취미판단이 타인의 판단과 동일한 기준에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는데, 개인의 개별적인 미감이나 경험이 판단 일반에 속하는 취미 판단이 되었을 때 타인과 소통 가능한 것,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판단력은 모든 판단자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능력이자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해 자신의 취미 판단 주장에 대한 동의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새끼의 사랑스러움, 내 새끼가 던지는 체인지업의 환상적인 무브먼트,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의 ‘대단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서 콧김 뿜뿜빠 해본 덕후들은 그렇다, 타인에게 미적 공통감각을 발생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소위 ‘영업’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미적 공통감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합치’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근거를 말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덕질이 이렇게 좋아요’ 수준의 영업이 ‘아니 이게 이렇게 짱인데 왜 그 격 떨어지는 걸 좋아하고 있어?!’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에 관한 토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동시에, 미적 판단의 만장일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보편성이라는 말이 조금 위험하게 독해될 수 있어 덧붙이자면, 칸트가 취미판단에서 이야기한 미적 공통감이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가슴 속에는 덕후의 기질이 엑스칼리버처럼 바위에 깊숙이 박혀 있다. 그걸 뽑으면 각성하게 되는데, 누가 나의 아더 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예측 불허면 덕후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 교통사고와 같다 하여 ‘덕통사고’라는 부를까.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사실 본인이나, 아니면 커뮤니티를 공유하는 또 다른 덕후가 아니면 모른다. 그저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다른 덕후와 스치면 취향이니 존중해주고, 그러는 수밖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천국과 지옥에 동시에 담갔다 뺐다 하기도 하는 덕질,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그저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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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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