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문학이 사랑한 꽃들
낮은 목소리로 고민 나눈 추억의 등나무꽃 그늘
이금이 『유진과 유진』 등나무
두 유진에게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차이는 상처를 다루는 방법에 있었다. 큰 유진의 부모는 딸의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안심시켰다. 그즈음 큰 유진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랑해’와 ‘네 잘못이 아니야’였다. 큰 유진은 별 탈 없이 성장했다.
등나무는 연한 보라색 꽃과 뙤약볕을 막아주는 그늘을 주기 때문에 학교나 공원 쉼터에 많이 심어놓았다. 몇 그루만 심어도 가지가 덩굴로 뻗어 나가면서 짧은 기간에 좋은 그늘을 만들어준다.
등나무 그늘은 학교의 상징이나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학교에는, 특히 여중 ? 여고에는 등나무 그늘이 꼭 있었다. 요즘처럼 교실에 에어컨이 없던 시절,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 잠시 앉아서 숨을 돌린 곳이고, 낮은 목소리로 친구들과 고민을 주고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5월 철쭉이 필 무렵 등나무꽃은 꽃송이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아래로 늘어지면서 핀다. 등나무꽃 하면 감미로운 향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금이의 『유진과 유진』 은 아동 성폭력 문제를 다룬 성장소설인데, 여중생 주인공들이 등나무 벤치 아래에서 얘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간 유진이는 깜짝 놀란다. 자기와 이름은 물론 성도 같은 유치원 때 친구 이유진이 같은 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유치원 때에도 큰 유진과 작은 유진으로 불렸다.
작은 유진은 전교 1등하는 모범생이다. 큰 유진은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명랑하게 성장하는 여학생이다. 그런데 작은 유진은 큰 유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작은 유진은 유치원 때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 나이였지만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자신이 그 유치원에 다닌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좀 이상했다.
답답한 큰 유진은 작은 유진을 학교 뒤 운동장의 등나무 벤치로 데려갔다. “너 정말 날 모르겠니?”라고 묻자 작은 유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느냐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큰 유진이 ‘그 사건’에 얽힌 얘기를 좀 해주자 작은 유진은 뭔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번에는 작은 유진이 큰 유진에게 등나무 벤치에서 보자고 했다. 큰 유진의 시각으로 쓴 대목이다.
나는 소라에게 집에 가는 대로 소식을 전해 주기로 하고 등나무 벤치로 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작은 유진이가 내 뒤를 보았다. 소라가 함께 오나 살피는 눈치였다. 등나무 줄기에도 등나무꽃의 울음이 돋아나고 있었다.
토요일 방과 후의 등나무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주말을 즐기기 위해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갔으리라. (중략) “할 이야기가 뭐냐?”
나는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등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노는 애처럼 다리를 건들거렸다.
_이금이 『유진과 유진』 중에서
등나무에서 새잎 돋듯 진실 알아가는 유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둘은 유치원 다닐 때 함께 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작은 유진은 이 기억을 잊어버린 것이다. 퍼즐처럼 맞추어 마침내 기억을 되찾은 작은 유진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학원에 빠지며 파란머리로 염색하고 춤을 배우는 등 방황하기 시작한다.
두 유진에게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차이는 상처를 다루는 방법에 있었다. 큰 유진의 부모는 딸의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안심시켰다. 그즈음 큰 유진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랑해’와 ‘네 잘못이 아니야’였다. 큰 유진은 별 탈 없이 성장했다.
반면 작은 유진의 부모는 상처를 억지로 봉합하면서 작은 유진의 기억에서 그 일을 지우려 했다. 작은 유진의 엄마는 당시 작은 유진을 목욕탕으로 데려가 목욕 수건으로 살갗이 벗겨지도록 문지르며 “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알았어?”라고 소리쳤다. 작은 유진은 아프다고 울다가 엄마에게 뺨을 맞았다. 이때 받은 심리적 충격으로 그 일이 작은 유진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작은 유진이 방황하는 것을 알아챈 부모는 작은 유진을 집에 감금하고 미국으로 유학 보낼 준비를 한다. 작은 유진은 큰 유진과 소라에게 도움을 청해 집에서 탈출하고, 셋이서 야간열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한다.
“절대 너희 잘못이 아니다.”
때로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사춘기 소녀들의 수다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아, 애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깨닫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작가는 ‘작가 인터뷰’에서 “세상의 많은 ‘유진’과 그의 가족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대로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분노와 좌절로 변해 아이들이 상처 받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이금이 작가(1962년생)는 충북 청원 출ㆍ으로, 『너도 하늘말나리야》 말고도 『소희의 방》, 『나와 조금 다를 뿐이야》, <밤티 마을 시리즈> 등 많은 아동ㆍ청소년소설을 냈다. 주로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다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장소설을 처음으로 쓴 것이 바로 『유진과 유진』이다.
[관련 기사]
- 삶이 곧 소설이었던 기구한 인생
- 도라지꽃을 바탕화면으로 깐 아이
- 유유자적 살롱의 5년간의 기록
-신부의 녹의홍상을 닮은 협죽도
관련태그: 문학이 사랑한 꽃들
12,820원(5% + 1%)
12,420원(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