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가족이 오늘의 가족이란 법은 없다
가족이 예전 같지 않아도 당황하지 않는 법
유년기에 형성된 연대는 자녀가 성인이 돼도 한참 동안 유지된다. 하지만 때로는 연대가 재형성되기도 하는데 이때 새로 그려진 연대의 선 때문에 어릴 적에 자신이 형제자매 중 최고의 자리를 종신직으로 보장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한다.
관계의 역전
유년기에 형성된 연대는 자녀가 성인이 돼도 한참 동안 유지된다. 하지만 때로는 연대가 재형성되기도 하는데 이때 새로 그려진 연대의 선 때문에 어릴 적에 자신이 형제자매 중 최고의 자리를 종신직으로 보장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한다.
한 가정의 예를 보자. 형인 월트는 공인중개사로 지역 사회에 공헌한 바를 인정받아 이런저런 표창장과 상을 받았고 시장, 국회의원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도 있었다. 월트가 그런 사진을 부모님께 드리면 부모님은 그것을 액자에 넣어 집안 여기저기에 걸어놓았다. 그 와중에 동생 어니는 단편 소설을 쓰며 작가 지망생으로 살고 있었다. 월트는 동생이 작가가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런데 상황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어니는 단편들을 출간하고 이어서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그리고 두 번째 장편이 큰 성공을 거둬 영화로 만들어졌다. 월트는 동생의 성공을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이제 월트가 전화를 걸면 부모님은 그의 안부를 간단히 묻고 어니가 최근에 일군 업적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그리고 부모님 댁에 가면 월트의 표창장과 사진을 담은 액자들은 옆으로 밀려나 있고 그 자리를 어니가 유명인사와 찍은 사진들이 차지하고 있는 광경을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그의 성공도 정말로 기쁜 일이었으나 월트는 자신이 우월한 지위와 안전감을 누렸던 곳, 바로 가정에서 좌천된 기분이었다.
법학도 브래드의 사례도 비슷하다. 브래드는 여동생이 딸 하나 딸린 증권 중개인과 결혼했을 때 묘하게 찜찜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브래드는 아직 기숙사에 사는데 동생네는 주택을 샀다. 브래드는 아직 헐값에 산 중고 가구를 쓰는데 동생네는 근사한 가구를 들였다. 무엇보다도 브래드는 아직 먼 훗날을 내다보며 가정을 꾸릴 기반을 닦고 있는데 동생은 부모님에게 이미 틀이 딱 잡힌 가정을 선사했다는 점이 가장 속상했다. 손위 형제자매가 그런 단계들을 먼저 달성하면 동생에게 귀감이나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생이 먼저 달성하면 손위 형제자매는 예상치 못했고 왠지 부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연대의 재설정으로 인해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고 탈선한 기분이 들 수 있다.
부모가 늙어갈 때
연대가 대폭 재설정되는 일은 부모님이 노년까지 생존하는 복을 누리는 가정에서 일어나지 않나 싶다. 부모가 나이 드는 것을 넘어 늙어가기 시작하면 성인 자녀에게 부모님을 돌볼 책임이 생기면서 예전에는 나이를 기준으로 확실하게 배정됐던,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역할이 서서히 뒤바뀐다.
나는 언젠가 공항에서 할머니가 어린아이 취급받는 광경을 목격했다. 아들네 식구가 그녀를 모두 똑같이 대했기 때문에 마치 아들네 식구가 간수 노릇을 하고 그 할머니는 탈옥하려야 할 수가 없는 수감자처럼 느껴졌다. 그 장면이 심금을 울린 까닭은 그때 내가 포트로더데일에 사는 부모님을 뵈러 가기 위해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고 내 앞에 줄을 선 그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70대 초반으로 보였고 옆에 서 있는 스무 살쯤 된 아가씨는 손녀가 틀림없었다. 시간은 12시 5분 전. 포트로더데일행 비행기는 12시 20분 이륙 예정이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안내판에는 우리 비행기명 옆에 1시 10분 이후에 다른 곳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함께 표시되어 있었고 양 비행기 탑승객이 한 줄에 뒤섞여 있었다.
내 앞에 선 할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내가 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행동에 나섰다. 두 줄로 서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먼저 이륙하는 비행기의 탑승객이 당연히 우선적으로 처리돼야 했다. 그녀는 직원에게 그런 이치를 따지기 위해 대열을 벗어나 창구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직원에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까 옆에서 아내와 또 다른 딸과 함께 서 있던 50대의 아들이 잽싸게 달려들었다. “다시 줄 서세요!” 그는 어머니를 큰 소리로 나무라며 다시 줄로 데려왔다. “무슨 폭동이라도 일으키시려고요?”
할머니는 왜 그랬는지 해명하려 했지만 온 식구가 웃으면서 아버지의 농담에 살을 붙이는 바람에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손녀가 “할머니는 더 신나게 살고 싶으신가 보다!”라고 농을 던졌고 또 어머니와 언니 들으라고 “우리 할머니 더 신나게 살고 싶으시대요!”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그들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지만 할머니를 좀 낮춰 보는 느낌도 분명히 있었다. 할머니는 가만히 줄을 서 있었다. 잠시 후 두 번째 촌극이 벌어졌다. 손녀가 “신분증 또 보여 달라고 할 거예요”라면서 할머니의 어깨에 걸려 있는 핸드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각도에서는 신분증이 잘 안 보이는지 핸드백을 끌어당겨서 제 몸에 바짝 붙이고 이리저리 뒤적였다. 자기 핸드백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는 할머니는 얼굴에 당혹감(절망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이 스쳤지만 손녀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안 했다. 어쩌면 금방 비행기에 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관심과 배려를 고맙게 여겼을 수도 있다. 온 가족이 공항에 배웅을 나온 것은 분명히 효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내가 부모님을 돕겠답시고 하는 행동도 다 저렇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부모님을 더 작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면서 관심을 표현하고 도움을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항에서 본 손녀는 마치 어른이 아이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듯이 할머니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건드렸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도움을 주는 행위 자체로 본인이 능력 있고 상대방을 좀 낮춰 볼 수도 있다는 메타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런 메타메시지는 도움을 통해 형성되는 연대에서 비롯된다.
연대는 바뀌고 또 바뀐다
수년 전에 대학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칠 때 나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실습을 했다. 수강생 전원에게 일어나서 둥글게 원을 만들고 그 원의 중심에 무엇이든 좋으니 소지품을 하나씩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면 보통 펜, 연필, 지갑, 열쇠, 공책, 립스틱, 아이라이너, 콤팩트 따위가 나왔다. 이어서 나는 아무나 좋으니 그 물건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보라고 했다.
모양을 기준으로 정리하면 원통형으로 된 펜, 연필, 아이라이너, 립스틱이 한 묶음, 사각형으로 생긴 공책과 지갑이 또 한 묶음이 되고 호루라기처럼 특이하게 생긴 물건만 덩그러니 남는다. 기능을 기준으로 정리하면 펜, 연필, 공책을 하나로 모으고 립스틱, 아이라이너, 콤팩트를 하나로 모을 수 있다. 색깔별로 정리하면 파란 공책이 파란 콤팩트와 짝이 되고 검은 공책이 검은 에나멜 통에 든 립스틱과 짝이 된다. 모두 이 정도면 정리 기준을 총망라했다고 생각할 때쯤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재료를 기준으로 플라스틱, 종이, 철로 분류한다. 정리 기준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그 물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됐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정리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연대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가족끼리 어떤 식으로 말하느냐, 무엇을 화제로 삼느냐, 어떤 정보를 드러내고 감추느냐, 함께 살면서 어떤 관심사, 시각, 경험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결속의 선이 그어지기도 하고 통제의 선이 그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연대가 형성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소외될 수 있다. 이를 알면 왜 가족과 함께하는 삶에서 끊임없이 위안과 고통이 출몰하는지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연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용하는지 알면 연대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따라서 식구들에게 왜 자신이 어떠어떠하게 반응했는지 설명해줄 수 있다. 그리고 말하는 방법을 바꿔서 연대의 재설정을 꾀하면 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가족들과 좀 더 편한 관계를 맺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갈 수도 있다.
* 이 글은 『가족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줄 알았다』의 일부입니다.
[추천 기사]
- 나도 모르게 가족에게 내뱉는 드라마 대사들
- 문득 낯설다, 내 편인 듯 내 편 아닌 가족
- 적응해간다는 것
- 힐링이 필요해
- 오늘도 가족과 다투고 출근한 당신에게
작가
<데보라 태넌> 저/<김고명> 역12,510원(10% + 5%)
가장 가까워서 더 어려운 가족의 대화법 《가족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줄 알았다》의 저자 데보라 태넌은 그동안 남녀 또는 가족 구성원의 대화 방식에 대한 흥미롭고 생생한 사례들을 연구해온 언어학자로, 어떻게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지 저자만의 특별한 방법들을 제시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