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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친 사랑의 거리, 그 쓸쓸함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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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서로가 세상의 모든 것 같았던 코너와 엘리노어는 뜨거운 사랑을 했다. 이어, 거친 숨소리로 자살을 시도하는 엘리노어. 평범하지만 행복했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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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 날의 날씨, 그 날의 감정, 그리고 그 날의 냄새. 하지만 가끔 그 날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날의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는 같은 일을 겪었지만, 각기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워지는 기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는 서로가 세상의 모든 것 같았던 코너(제임스 맥어보이)와 엘리노어(제시카 차스테인)는 뜨거운 사랑을 했다. 이어, 거친 숨소리로 자살을 시도하는 엘리노어. 평범하지만 행복했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잔잔한 사랑이야기로 시작해서, 급변하는 이야기의 정서는 그렇게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의 이야기를 관통한다. 갑작스런 변화 속에서 엘리노어는 무작정 달아나고, 코너는 그녀를 쫓지만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교차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겪은 깊은 상처가 드러낼 즈음, 서로는 느낀다. 함께 겪은 사건을 극복하는 다른 태도와 기억 때문에 두 사람은 점점 더 먼 길로 따로 걸어가고, 서로의 행동을 품어내지 못한다.  네드 벤슨 감독의 데뷔작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 그여자><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한 일종의 3부작의 마지막 버전이다. 앞선 두 편의 영화를 나란히 두고 본다면 훨씬 더 이해의 깊이가 넓어지겠지만, 상실을 극복하는 다른 방법 때문에 결국 나란히 걷지 못하는 두 남녀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도 오롯이 담겼다.

 

영화는 엘리노어와 코너가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발을 벗고 도망갈 준비를 마친 엘리노어는 코너에게 눈치껏 따라오라고 속삭이며 달아난다. 그리고 비극을 맞이한 두 사람 중 엘리노어는 첫 장면처럼 늘 먼저 달아나고  코너는 그녀를 뒤쫓는다. 사랑할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달렸던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늘 어긋난다는 것이다. 늘 앞서가거나, 뒤에서 따라가거나 스쳐갈 뿐, 같은 길을 걷지 못한다. 포스터가 전달하는 이미지와 달리 <엘리노어 릭비>는 애잔한 사랑을 그리는 멜로 영화가 아니다.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속에 지긋지긋하지만 끝내 구심점이 되어 그 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코너와 엘리노어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낸다. 이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애잔한 기억은 편린처럼 떠돌지만, 역시 함께 나눈 기억은 다시 쓸쓸하고 아픈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 상대방의 따뜻한 심장이 아니라, 계속 되짚어가야 하는 나의 기억이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그래서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공허하다. 각자의 기억이 달라 명쾌한 처방이 없는 상실의 아픔은 먹먹한 시간과 함께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생존법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은 교차점 없이 점점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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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 벤슨 감독은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다른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각각의 사람이 상처를 극복해 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코너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으로 상처를 극복하려하고, 릭비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릭비는 코너의 일상성이 서운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릭비의 모습을 코너는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것이라 이해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면서, 스스로 외면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같은 시간 동안 사랑했지만, 서로 다른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남녀의 시선을 꽤 고르고 균등하게 보여주며, 두 사람의 행동을 옹호하지도 편을 들지도 않는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행동하는 두 사람을 통해 관객들은 결국 제 자리로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열을 함께 겪는다. <어톤먼트><비커밍제인> 등의 로맨스 영화의 풋풋한 청년에서 깊은 슬픔을 간직한 남자로도 잘 어울리는 제임스 맥어보이는 과장된 표정 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로 애잔한 진심을 전한다. 우리에겐 <인터스텔라>로 기억되는 제시카 차스테인은 대기만성형 여배우로서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자벨 위페르와 윌리엄 허트 등 연기파 배우들이 든든하게 또 다른 상실을 극복하는 가족의 한 축을 연기한다. 아주 소수의 극장이긴 하지만, <엘리노어 릭비 : 그남자><엘리노어 릭비 : 그여자>의 버전도 함께 볼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 쯤 엘리노어 릭비는 거리를 걷는데, 그녀의 뒤로 그라피티가 비친다. 무심한 듯 지나치다가, 마치 같이 바라보라는 듯 그녀는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그 그라피티는 마치 영화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이 영화의 숨겨진 상징이기도 하다.

 

 Love isn’t missed by minutes. It’s missed by miles
 사랑은 시간이 아니라, 거리 차로 놓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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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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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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