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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누구 맘대로?
적정선과 결핍, 과잉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패션잡지 <그라치아>에 실린 칼럼에서 김태훈은 어떠한 근거나 논증 없이 ‘21세기는 온전히 페미니즘의 시대’라고 단언한다. 현 정부가 툭하면 과잉 복지가 나라를 망친다는 말을 내세우지만, 국민 중 누구도 과잉 복지를 누린 적 없다는 점에서 ‘온전한 페미니즘의 시대’는 신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겠다.
적정선과 결핍, 과잉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웠던 ‘미만’과 ‘이하’, ‘초과’와 ‘이상’은 명확한 수치가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게 계량할 수 없다. 이쯤에서 요리 초보들을 소환해보자. ‘소금 적당량, 고추장 적당량, 후추 적당량, 설탕 적당량이면…참 쉽죠?’라는 레시피에 속아 음식물 쓰레기를 연성해본 자라면 그 적당량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며 모호한지 절절하게 느낄 것이다. 한 그릇의 음식을 만드는데도 그럴 지언데 이 세계에서는 어떨까. ‘적당한 ~’라는 표현은 편리하다. 그만큼 자주 쓰인다. 그 전방위적인 사용은 가히 단어계의 게보*, 혹은 시골 어르신들의 한 사발 가득 탄 믹스커피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수십 가지의 증상을 한 방에 뭉뚱그리는 힘이 있다고.
천안함 침몰 사고 당시 일부 정치인은 유가족을 짐승 같다고 말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이 슬픔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고 마구 울부짖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적절한 슬픔의 표현은 어느 정도였을까. 슬픔도 영상물 등급심의처럼 강도가 정해져 있다면, 아무 잘못도 없이 죽어가는 가족을 목도할 때 인간은 어떤 포즈를 선택해야 했을까.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유가족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눈에 미개인으로 비쳤다. 화내고, 소리 지르고, 물세례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고가 난 지 10개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배가 왜 가라앉았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하면 됐다’. 역시 적정 한도를 초과했다는 이유지만 이번에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당사자, 즉 유가족이나 피해자가 아니다. 의대생 성추행 사건 때 피해자는 ‘동기에게 너무 과한 대응을 한다’는 비난에 직면했고, 반도체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받으려는 시도는 ‘적당히’ 합의하지 않는 데는 더 큰 꿍꿍이(예를 들면 더 큰 금액의 보상금)가 있다는 의혹을 견뎌야 했다. 학교 폭력 피해자나 내부 고발자는 ‘문제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적정선에서’ 문제를 덮으려는 시도로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이렇듯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적정선을 책정하고 강요한다. 따르지 않으면 손쉽게 과잉이나 결핍으로 낙인 찍고, 비난한다. 참 쉽다. 최근 논란이 된 김태훈 칼럼니스트의 소위 ‘무뇌아 페미니즘’ 발언도 같은 맥락의 문제이다.
패션잡지 <그라치아>에 실린 칼럼에서 김태훈은 어떠한 근거나 논증 없이 ‘21세기는 온전히 페미니즘의 시대’라고 단언한다. 현 정부가 툭하면 과잉 복지가 나라를 망친다는 말을 내세우지만, 국민 중 누구도 과잉 복지를 누린 적 없다는 점에서 ‘온전한 페미니즘의 시대’는 신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겠다. 존재한다고 하는데 정작 본 사람은 없는? 글에서 ‘온전히’라는 표현은 한 번 더 등장한다. 피임약의 발명으로 여성은 ‘온전히’ 자신의 성적 자율권을 갖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여성의 온전한 성적 자율권’이라는 말은 역설법과 같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불가능하다. 여성의 몸을 하고 12시간만 살아본다면 왜 이 표현을 역설법이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안에는 여성의 순결 이데올로기부터 시작해서 성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구도, 처방전 없이는 사후 피임약도 구할 수 없는 의료권력 등 층위가 다양한 문제들이 정교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글 전체에서 ‘과잉’ 페미니즘은 결국 각종 여성 혐오 범죄와, 한 소년의 이슬람 테러 단체 가입의 원인으로 지목 당한다. 사과문이 공개된 뒤에도 논지는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이미 적정선을 넘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편 가르기가 횡행하고, 장사꾼들이 그것으로 돈을 번단다.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마이 묵기는커녕 대체 온전한 페미니즘이라는 게 뭔지 맛도 못 본 당사자들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혈압이 오를 수밖에. 페미니즘이 편의점에 존재하는 물티슈 같은 존재라는 표현은 수사적으로 꽤 괜찮은 은유이다. 여성혐오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에서, 페미니즘은 ‘더러운(혹은 기가 쎈)’ 여성을 쓱 닦아(너 페미니스트지?) 집어던지는 간편한 1회 용품 정도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페미니즘은 단 한 번도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몫을 찾으려는 시도가 ‘무뇌아적’ 탈취와 밥그릇 뺏기로 보였다면 인사해, 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수억 개의 여성혐오 크리스탈…☆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흔히 정치라고 하면 선거에서 표를 끌어와 정당 몇 개를 차지하고,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며 거부감을 느끼기 쉬운데 본고에서 사용하는 ‘정치’는 랑시에르의 용어를 따른다. 자크 랑시에르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정치(politique)와 치안(police)이라는 두 가지 번역 용례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두 종류의 정치를 구별할 것을 주장한다. 통념적 정치활동은 후자, 즉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치안의 정치이다. 민주주의와 같은 특정 정치 체제와, 그것을 유지하려는 시도―통상적인 정치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한편 이러한 치안의 논리를 넘어서는 미학의 정치가 존재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분배)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셈,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욕구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에만 속해 있는 것으로 셈해지던 자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보이게 만든다. 정치의 논리는 어두운 삶[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으로밖에 자각되지 않았던 것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내가 ‘몫 없는 자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 자크 랑시에르, 「감성적/미학적 전복」, 2008년 홍익대학교 강연문
랑시에르식으로 말하면, 정치적 투쟁이란 본래 복합적 이익 사이의 합리적 논쟁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정당한 상대자의 목소리로 인정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의 세계는 치안과 정치,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굴러간다. 특정한 정치 체제는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발화만을 인간의 언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정치적 자리와 몫을 할당하는 반면, 그 집단 외부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동물이 내는 소음으로 간주하며 그들에게 어떤 몫도 할당하지 않으려 한다. - 『시대와 철학』 20호, 2009, p. 404~405
이것은 정치체제가 존재의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분배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정치는 이에 대항하여 특정 분배의 형식 속에서 제 몫을 전혀 갖지 못한 이들이 이견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밥그릇 싸움’이라고 폄하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정치적 투쟁은 밥그릇 싸움이다. 도대체 무슨 고상한 것을 위해서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가? 목소리를 내고, 지워졌던 정체성을 드러내며,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몫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정치적 투쟁이고 밥그릇 싸움이다. 마치 집요정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청소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례나, 아동 및 성소수자 인권 개념도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를 특정 정치체제 안에서 권력을 소유하는 문제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몫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몫을 부여하는 새로운 분배 형식을 찾아가는 활동을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다른 정치체제로의 이행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의 특징이 나타난다. 정치는 ‘일치(consensus)’를 넘어선 ‘불일치(dissensus)’의 분배활동이라는 것이다. -
『시대와 철학』 20호, 2009, p. 404~405
이 불일치는 개인적 이익 또는 의견들에 관한 반목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주체와 대면시킴으로써 감각 질서 내부에의 균열을 창조하고 사법 상의 소송에 저항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2008, p. 122
겉으로 보기에 조화롭고 안정적인 공동체라고 해도, 그 치안의 질서 안에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착취하여 가능한 질서가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모두가 만족하고 합의하는 ‘적정선’ 혹은 ‘적정량’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맞닥뜨린 이들은 그 사태를 은폐하려는 구조와 충돌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이 발생한다. 치안의 논리는 이 불편함을 무기 삼아,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려는 이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킨다. “그만하면 됐다”는 말은 단순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서적 결핍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투쟁을 봉쇄하고 무마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해당 칼럼은 남성들이 과잉된 페미니즘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으면서, ‘동물적 본능’으로 강력히 저항한 결과가 일베와 남성연대라며 혐오를 정당화한다. 이는 단편적인 예시에 불과하다. 여성혐오야말로 물티슈처럼 도처에 널려 있으니 페미니즘이 테러단체보다 위험하다는 논리는 전혀 새롭지 않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하고 막아서야 하는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혐오와 폭력이 날개를 달고 일어설 때. 여기에는 적정선이라는 것이 없다. 적정선까지 차오를 때까지 두고 볼 필요도 없다. 발산되고 분출되는 그 순간 이미 과잉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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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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