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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얼굴>, 정말 얼굴이 운명을 결정합니까?
KBS 드라마 <왕의 얼굴>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모두 알아낼 수 있다는 믿음, 관상에 대한 확신은 드라마를 이끄는 뿌리다. 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관상의 힘을 믿고, 자신의 관상을 보완하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국정운영을 종교나 미신에 기댄다고 하면 실소를 터뜨릴지 모른다. 하지만 신권과 정치가 합일된 제정일치 국가는 아직 존재하고,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왕조에도 관상감이나 소격서, 성수청과 같은 다양한 종교 기관이 있었다. 당대 인류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끝없는 탐구욕은 종교와 미신을 만들어냈고, 그를 믿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종교나 신화는 실존하는 어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근거라기보다는 오랜 생존활동에서 발달한 인간의 본능인 셈이다.
KBS <왕의 얼굴>은 그중에서도 관상이란 점술에 대해 다룬다. 드라마는 ‘왕이 될 관상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얼굴을 읽을 수 있는 관상술을 중심으로 왕의 자리에 앉기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다툼을 그린다. 대군인 임해군(박주형)이나 신성군(원덕현)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인 역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격렬히 싸운다.
관상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인 만큼, 그 과정에서 관상은 절대적 기술로 묘사된다. 뛰어난 관상가가 사람의 궁합이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광해(서인국)는 얼굴만 보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맞히고, 김도치(신성록)는 관상으로 죽은 사람의 사인을 밝혀낸다. 왕이 될 얼굴을 그린다는 용안비서는 정감록 이상의 신빙성과 영향력을 가진 예언서 취급―드라마 속 대동계(大同契)는 귀천 없는 대동한 세상을 이루겠다는 것을 목표로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려 하는데, 대동계의 도치가 가장 먼저 노린 것 역시 용안비서다―이고, 지고지상의 임금조차도 관상가의 말에 안달복달한다. 아무리 무속신앙이나 주술의 힘을 믿던 시대라고 해도 드라마가 그리는 관상의 힘은 무서울 정도다.
물론 관형찰색(觀形察色)만으로 미래를 점칠 수 있는 관상술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는 관상보다 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로 관상에 대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이다.
출처_ KBS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모두 알아낼 수 있다는 믿음, 관상에 대한 확신은 드라마를 이끄는 뿌리다. 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관상의 힘을 믿고, 자신의 관상을 보완하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선조(이성재)에 이르면 그 믿음은 무서울 정도다. 자신이 절대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라는 말은 선조의 뿌리 깊은 열등감을 만든 근간이 되었고, 모든 것이 자신의 얼굴 때문이라는 피해망상을 낳았다. 광해의 얼굴에 침을 놓아서라도 왕의 얼굴을 갖게 하려는 강박 역시 그래서다.
맹목적 믿음은 끔찍한 결과를 부른다. 중세 유럽 횡행했던 마녀사냥이 그렇다. 이교도 박해를 위해 등장한 종교재판은 이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수단이 되었고, 마녀사냥은 악마적 마법과 주술이 존재한다는 믿음 아래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이 참사엔 우매한 대중의 맹목적인 믿음이 한 몫을 했다. 심지어 만민을 다스리는 절대군주가 점법을 맹신하고 그에 집착한다니, 끔찍한 종막이 눈에 그린 듯 선하다. 가희 가문의 참극 역시 선조의 관상에 대한 집착 때문 아닌가. 용안비서에 대한 집착은 대동계에 대한 분노와 경계로 이어졌고, 때문에 가희의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드라마는 군주의 그릇된 믿음이 어떤 재앙을 부를 수 있는지 김가희(조윤희)라는 인물로 설명한 셈이다.
다행히 광해는 아버지 선조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드라마 속 선조와 광해의 대립은 여인 김가희를 사이에 둔 때문만은 아니다. 드라마는 이 부자가 이미 통치 이념에서 큰 차이를 가졌음을 드러낸다. 광해는 관상을 읽을 줄 알고 심지어 뛰어난 관상술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관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김두서의 집안을 역모로 처단한 선조에게 광해는 울부짖으며 묻는다.
“아바마마께서 두려워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바마마께서 이미 왕이시거늘 대체 무얼 그리 두려워하시는 것이옵니까.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오직 하늘과 백성뿐이옵니다. 하온데 무엇이 두려워 죄 없는 신하들을 처형하고 그 자식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것이옵니까! 그깟 관상 따위가 무에 그리 두려우십니까. (…) 성군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천지에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는 성군도 있습니까. 이미 만백성이 아바마마를 우러러보거늘, 무엇이 두려워 그깟 관상서 따위가 뭐라고 저 많은 백성들을 죽이는 것이옵니까!”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오직 하늘과 백성뿐이라는 대사는 인상 깊다. 광해가 군주의 덕목을 이미 갖추고 있는 한편, 그에게 관상술은 그저 한 가지 도구일 뿐임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신성군에게 활을 쏜 대동계를 감싸는 장면도 그렇다. 분노한 선조 앞에서 광해는 말한다. 그들은 역적이 아니고, 그저 마음에 작은 원한을 갖고 사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백성일 뿐이라고. 그들의 마음을 자비로 보듬어야 한다고. 만민을 굽어 살피고 어린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드라마는 광해가 선조의 반대에서 관상보다 심상, 마음의 모습을 살피는 왕이 될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란 말처럼.
광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왕의 얼굴>은 결국 관상의 힘이나 절대성을 강조하는 작품은 아니다. 관상을 통해 심상을 읽고, 이런 저런 심상의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시류를 그릴 것이다. ‘얼굴을 읽는 자, 천하를 얻는다’라는 홍보문구 역시 그런 의미일 터다. 관상에 얽매여 허덕대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읽고 시류를 보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것.
관상은 그저 소재일 뿐이다. 드라마는 관상을 통해 인간을,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린다. <왕의 얼굴>이 관상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차용한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러 고민할 만한 주제를 던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는 현명한 리더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아집으로 어리석은 믿음을 고집하고 있진 않은가? 나의 맹신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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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