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판타지, 이미 끝나버린 그 달큰한 기억에 빠져 설레게 만들었던 <건축학개론>과 <늑대소년>에 이어 좀비와의 사랑을 그린 <웜 바디스>까지…….사랑의 시작과 그 설렘, 녹아버릴 것 같은 뜨거운 정념에 이르기까지 로맨스를 그린 영화는 여전히 사람들을 흐뭇하고 설레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연애가 정말 달콤하기만 할까? 작년 개봉해 인기를 끌었던 <나의 PS 파트너>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얼굴로 다가왔지만, 그 속에 현실의 비루함과 오래된 연인의 무심함에 상처받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현실감 있게 담아냈었다. 폰섹스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작하지만, 이 영화는 종종 로맨틱한 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구질구질한 삶과 연애에 대해 민낯을 불쑥 꺼내 보여 공감을 얻었다.
노덕 감독의
<연애의 온도>는 조금 더 나아가 BB 크림조차 바르지 못한, 말 그대로 쌩얼을 들이미는 영화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내 커플, 3년간의 연애가 끝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치졸하게 서로를 괴롭히면서도 서로의 빈자리를 의식하고,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을 하면서도 서로의 페이스북을 훔쳐보고, 새로 만나게 된 연인을 뒤쫓기도 한다. 연수원에서의 폭행 사건 이후, 재결합하지만 이들은 이내 똑 같은 이유로 싸우고 서로 다른 마음으로 헤어진다. 억수같은 비가 그친 놀이공원에서…….
노덕 감독은 극의 현실성을 높이고 주인공의 이야기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물들의 인터뷰를 따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왔다. 고정된 카메라 대신 핸드 헬드 촬영기법을 활용한 장면은 사실감을 더욱 높인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 대신 ‘너 같이 미친 X는 처음’이다, ‘이런 개 같은 XX’라는 욕설이 오가는 생활형 연애는 서로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지긋지긋한 현실 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연애의 온도>는 연인들이 재결합해서 보여주는 달콤한 연애의 시작 지점 역시 놓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 역시 암울하지 않다. 연애 따윈 필요 없어라는 결말 대신 다시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일상적인 만남을 이어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통해 노덕 감독은 평범한 이들을 평범한 세상 속으로 돌려보낸다. 이들이 다시 만나는 장소가 그들이 그간 촬영했던 다큐멘터리의 시사회장이라는 점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촬영 중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의 거짓말로 채워진 픽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연애담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들은 많았지만,
<연애의 온도>가 지금, 오늘, 여기에서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연애라는 판타지로 대리만족을 주는 대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연애라는 일반적인 민낯을 보여주고 공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
<연애의 목적>
<6년째 연애 중>
<처녀들의 저녁식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처럼 판타지가 없는 연애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도 있지만, 그 중 가장 노골적이고 현실적인 연애담을 그린 영화는 2005년 한재림 감독의
<연애의 목적>이었다. 박해일과 강혜정이 그려내는 두 남녀의 연애는 노골적인 섹스와 섹스의 전후를 오가는 치사하고 보잘 것 없는 진담으로 채워진다.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노골적인 대사가 오가는
<연애의 목적>은 고약한 연애의 현실을 담아낸 영화였다. 2008년 박현진 감독의
<6년째 연애 중>은 연애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는 커플이 새로 눈앞에 나타난 사람에게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해 낸다. 여기에 서른이라는 현실적 나이를 앞둔 주인공의 사회적 고민까지 끌어안는다. 2011년 전계수 감독의
<러브 픽션>은 조금 쉽다. 로맨틱한 만남과 서로에게 싫증을 내는 과정을 심각하지 않게 되물으며, 연애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호프 스프링즈>
속물 같은 남녀 사이의 일상적 이야기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는 가정과 제자와의 연애 사이에서 궁상을 떠는 교수 캐릭터가 여지없이 등장한다. 유부남이라면 당사자에게나, 그 배우자에게나 혹은 불륜의 대상에게나 ‘연애’는 달콤한 현실이 아닌 거짓말과 비밀로 점철되는 셈이다.
<연애의 온도>의 주인공들이 결국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 생활 31년차가 되었다면 어떨까? 곧 개봉을 앞둔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의
<호프 스프링즈>의 아주 오래된 부부처럼 서로에게 관심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리지 않을까? 31년차 부부인 케이(메릴 스트립)와 아놀드(토미 리 존스)는 오랜 각방살이에 익숙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는 대화에 더욱 익숙하다. 마치 동성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것 같은 삶에 신물을 느낀 케이는 아놀드를 성상담 프로그램에 끌어들인다. 중년 여성이지만 여전히 소녀적 감성으로 꿈을 꾸는 케이와 무뚝뚝한 남편 사이의 변화와 그 노골적 해피엔딩은 할리우드적이지만, 오래된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는 충분히 공감을 얻을만 하다. 단지 장소를 바꿔가며 섹스를 시도하던 부부가 결국 침실로 돌아와 섹스에 성공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조금 더 도발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연애의 민낯을 보여준 많은 영화들이 앞서 있었지만,
<연애의 온도>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연애의 온도>에 등장하는 남녀의 속물적 모습에서 우리는 마치 볼 일을 보다 들킨 것 같은 무안함이 아니라, ‘우리처럼 다들 저러고 사는 구나’ 라는 보편적 감정의 위안을 얻게 된다. 극장을 나선 당신의 옆에는 이민기처럼 멋지거나, 김민희처럼 예쁘지는 않은 연인들이 서 있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싸움 끝에 헤어진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건, 여전히 지겹지만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건, 설렘으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이건 지금, 여기 혹은 그때, 거기에서 당신의 손을 꼭 잡아주었던 상대방의 마음과 맞잡은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으므로 세상의 모든 연애는 계속 되어 마땅할 것이다. 날 것처럼 비릿해도 그것이 연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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