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Moment - 불꽃이 터지던 밤베르크의 어느 저녁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이따금 옛날 사진을 뒤지다가 초점도 안 맞고, 제멋대로 흔들린 불꽃 사진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찍어댔을까? 그건 어쩌면 그때 나라는 사람이 초점도 안 맞고, 제멋대로 흔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불꽃이 터지던 밤베르크의 어느 저녁
독일 바이에른(Bayern) 주의 작은 도시 밤베르크(Bamberg)에 도착한 것은 늦여름이었다.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에 숙소가 있었다. 짐을 푼 다음 날이 공휴일인 8월 15일(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배가 고파서 나가보니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슈퍼마켓도, 구멍가게도. 미처 먹을 것을 사두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시내를 헤매다가 전날 기차역에서 본 역 구내 매점이 떠올랐다. 역전까지 갔더니 근처에 문을 연 중국 식당이 보였다. 외국의 중국 식당 볶음밥은 구호단체의 긴급 지원 물품처럼 빠르게 나오고, 양도 넉넉하다. 해서 볶음밥을 테이크아웃해서 두 끼를 때웠다.
밤베르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반할 만큼 살기 좋은 곳이지만, 또한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살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슈퍼마켓이 문 닫는 시간만 봐도 알 수 있다. 8월 15일은 공휴일이어서 그랬다 치더라도 평일에도 모든 슈퍼마켓이 4시에 문을 닫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 외곽으로 나가면 밤까지 문을 여는 대형 할인점이 여러 곳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낮 동안 소설을 쓰고, 볼일도 다 본 뒤에 느지막이 슈퍼마켓을 찾았다가 닫힌 문앞에서 얼마나 황당했던지. 중국인, 오직 그들만이 유럽의 휴머니스트였달까.
관광하러 간 것도, 유학 간 것도 아니었다. 그 한적한 중세 도시에서 석 달 동안 머물며 소설을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기간 내내 내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동네 빵집에 가서 빵을 산다(오전 8시만 돼도 빵을 다 팔고 문을 닫으니까). 아침을 해결하고 설거지를 한 뒤 잠시 운하를 감상하며 커피를 마신다(오늘도 멋진 하루가 될 거야!), 그러다 보면 점심 때가 되고, 식당에 가서 주문하고 기다리고 먹고 하노라면 1시간이 훌쩍 지나가므로(여긴 바이에른이고 식사 후 계산서를 받는 데만 10분은 걸린다) 그냥 해 먹기로 한다.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이제 잡다한 일은 대충 끝났으니 책상에 앉아서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생각한다.
주인공은 북한에 밀입국하기 위해 베를린에 온 대학생인데, 점점 외로워진다. 베를린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모든 건 낯설고, 무엇보다 ‘슈퍼마켓이 너무 일찍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어 시계를 보면, 이미 3시가 넘었고 이제 장을 보지 않으면 저녁을 못 먹는다. 4시가 되기 전에 슈퍼마켓에서 파스타와 물 따위를 사서 돌아오면 온몸이 녹초가 된다. 그러나 먹어야 소설을 쓸 수 있는 법. 남은 힘을 모아서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한 심신으로 전업주부의 애환이 물밀듯 밀려온다. 친구가 있다면, 오직 하나. 4유로에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리슬링(Riesling) 포도주뿐이다. 그래서 리슬링이라면 사선을 함께넘은 군대 동기 이름처럼 들린다. 보통 와인은 750밀리리터인데, 이건 1리터다. 코르코를 뽑은 와인을 반만 마시고 남겨둔다는 것은 와인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습관은 무서운 것이라 4분의 3정도 마시면 필연적으로 충분히 마셨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나가면 신천지다. 과연 1리터를 다 마시니 이런 곳이 있었는가 싶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깨면 아침이고, 빵집 문 닫을 시간이다. 당연히 소설을 쓸 시간이, 그곳 밤베르크에는 없다. 최근 출간한 밀란 쿤데라의 신작 소설이 14년 만에 나온 것이라던데, 이해할 만하다.
그날도 그런 저녁 중 하나였다. 숙소 식탁에 리슬링 1병과 잔을 올려놓고 앉아 있으면 서쪽으로 난 창에서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그 너머 2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밤베르크 대성당이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리슬링을 마시노라면, 노을에 비낀 대성당 첨탑 위 하늘로 새가 선회하는 것이 보였다. 최면술사가 눈앞에서 흔드는 추처럼 선회하는 새들을 바라보노라면 점점 취기가 올라왔다. “괜찮아, 다 괜찮아. 혼자 리슬링 1병을 마셔도 다 괜찮아.” 새들은 내게 속삭였다. 그러면 그런가 싶어서 또 1잔 마시면, 속삭임은 더 커졌다. “이 인생은 모두 너의 것이고, 그게 외로움이라도 마찬가지야. 네 것인 한에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야. 우리라면 그걸 즐길 거야.”
그렇게 해는 저물고, 대성당의 첨탑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속 삭임도 흔적 없이 흩어졌다. 나는 취했고, 좀 자고 싶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대성당 하늘 위로 불꽃이 터진 것이다. 아마도 무슨 축제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종류의 불꽃이 그 창을 가득 메웠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카메라를 꺼내 불꽃을 찍기 시작했다. 참으로 필사적으로 찍었던 것 같다. 그 사진은 지금도 내 하드디스크에 보관하고 있다. 이따금 옛날 사진을 뒤지다가 초점도 안 맞고, 제멋대로 흔들린 불꽃 사진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찍어댔을 까? 그런 의문이 든다. 그건 어쩌면 그때 나라는 사람이 초점도 안 맞고, 제멋대로 흔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왜 찍은 거니?”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 해도 지울 수 없는 사진이 있는 법이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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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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