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예술의 관능, <킬 유어 달링>
1950년대 미국 문학계를 흔들었던 비트세대의 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 <킬 유어 달링>
비트세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모르더라도, <킬 유어 달링>은 충분히 즐길만한 복고적 정서와 세련된 분위기로 가득한 영화다.
나쁜 예술의 관능, <킬 유어 달링>
지금 현재의 내 삶에 미래도 탈출구도 없어, 숨이 꽉 막힌다고 생각하는 청춘이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순응하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예 달아나버리거나, 제도에 맞서 싸우는 일일 것이다.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피와 반항이 짝패가 되는 순간, 삶은 관능과 퇴폐에 휩싸이기 쉬워진다. 술, 마약, 섹스 등을 통해 매일 밤 좌절의 밤을 견디고, 금기된 것들에 도전하는 사이 관능적 삶이 만들어낸 퇴폐는 삶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 문학계를 흔들었던 비트세대의 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 <킬 유어 달링>은 무의미의 세대를 겪어온 청춘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드러내는 영화다.
비트세대란 1920년대 대공황이 있었던 상실의 시대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한 세대로 전후 50년대와 60년대의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냉정하게 버려졌다고 생각하면서, 동시대 사회와 문화구조에 저항한 특정 문학가와 예술가의 그룹을 지칭한다. 비트세대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시집 「울부짖음(Howl)」(1956)을 통해, 혼란스럽고 외설스러운 비트 세대의 작품과 달리 강한 힘과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킬 유어 달링>은 틀에 박힌 제도권의 권위와 무감각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세웠던 비트 세대 작가의 출발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관점은 앨런 긴즈버그(대니얼 래드클리프)와 그의 작품에 영감을 준 뮤즈 루시엔 카(데인 드한)의 관능적이고 날카로운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하는 것들을 죽인’ 다음에야 성장이라는 단계를 밟아가는 청춘의 운명을 동정한다.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에게서 달아나 콜롬비아 대학에 진학한 앨런은 자유롭고 퇴폐적인 매력을 지닌 루시엔 카에게 한 번에 매료된다. 루시엔의 매력에 중독되듯 빠져드는 앨런은 ‘뉴 비전’이라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정말 뜨거웠지만, 그 열정은 활활 불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처럼 짧지만, 서로의 마음에 짙은 화상을 남긴다. <킬 유어 달링>은 노골적이지 않은 퀴어 영화의 공기로 가득한데, 흔히 작품에 영감을 주는 뮤즈의 자리를 치명적 매력을 지닌 남자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엔과 앨런 사이에 감도는 정서적 농도와 은밀하게 흐르는 눈빛의 화학반응은 분명 야릇한 연애담처럼 펼쳐지지만, 영화는 혹은 두 배우는 계속 한발 물러나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데인 드한이 내뿜는 퇴폐미와 야릇한 눈빛, 그리고 계속해서 앨런에게 섹슈얼한 관계의 곁을 주는 행동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팜므 파탈의 역할을 했던 여배우가 내뿜는 농염의 공식을 따른다. 그런 루시엔의 캐릭터는 데인 드한이라는 배우를 만나. 앨런뿐만 아니라 관객까지도 퇴폐의 아름다움과 그 정념의 곁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청춘과 몽환적 분위기에 충분히 매혹은 시켰지만, 루시엔이 지니고 있던 비밀과 앨런과의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의 교류에 깊이가 더해지지 않아, 영화는 더 짙은 관능과 나쁜 예술이 주는 생채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짝 주춤거린다.
하지만 두 배우의 화학반응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정서는 연출이 메우지 못한 허점 사이를 유연하게 채운다. 우선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변신은 성공적이다. 해리 포터라는 영특한 소년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그는 아주 많은 노력을 했다. 미성년자이지만 전라 연기를 감행했던 연극 <에쿠우스>를 비롯하여, 성인이 되어 실체가 없는 공포에 맞서는 <우먼 인 블랙>을 통해 서서히 자신의 얼굴에서 마법 소년의 이미지를 지워갔다. <킬 유어 달링>은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성인이 된 자신의 얼굴과 연기를 보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반짝반짝 빛날 것만 같던 청춘의 그늘과 날카로운 칼에 베이고서야 훌쩍 성장할 수 있는 자신의 20대처럼 고뇌하는 작가 앨런의 캐릭터를 통해 그는 꽤 자연스럽게 해리 포터가 아닌, 대니얼 래드클리프라는 배우가 되었다. 지금, 현재 가장 뜨거운 배우 데인 드한의 매력은 시쳇말로 치명적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을 중독 시키지만 손을 뻗어서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은 매혹이 데인 드한을 아우라처럼 감싼다. 동시에 여전히 덜 자란 것 같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몸매는 어딘지 모를 보호본능을 자아내기도 한다.
물론 비트세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모르더라도, <킬 유어 달링>은 충분히 즐길만한 복고적 정서와 세련된 분위기로 가득한 영화다. 1950년대 뉴욕의 풍경은 낭만적이고, 주인공들을 감싸는 재즈 음악은 퇴폐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더한다. 실제 이들이 콜롬비아 대학 도서관에 잠입하는 장면은 뉴욕대학 도서관에서 촬영, 1940년대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고, 고전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대니얼 래드클리프와 데인 드한의 연기는 자기들끼리 화학작용을 더하면 생생하게 살아있다. 손대면 베어버릴 것을 알면서 손을 뻗게 만드는 나쁜 예술을 상징하는 루시엔을 통해, 생채기를 내는 나쁜 예술의 매혹을 더 깊이 드러내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데인 드한을 통해 매혹될 수밖에 없는 ‘나쁜 남자’ 혹은 ‘나쁜 뮤즈’가 주는 예술적 영감의 정서는 다행히도 생생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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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